원색으로 타오른 老화가의 열정

  • 입력 2007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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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노랑 파랑을 비롯한 삼원색의 향연으로 가을의 서정을 표현한 ‘인왕산 추경’. 사진 제공 갤러리현대
빨강 노랑 파랑을 비롯한 삼원색의 향연으로 가을의 서정을 표현한 ‘인왕산 추경’. 사진 제공 갤러리현대
우리 토속 정서를 화려하고 농밀한 색면 구상으로 표현한 작가 류병엽 씨. 석동률 기자
우리 토속 정서를 화려하고 농밀한 색면 구상으로 표현한 작가 류병엽 씨. 석동률 기자
■ 고희 맞은 류병엽 씨, 5년만에 개인전

“1978년 마지막 날, 그제야 붓이 캔버스에 닿았습니다. 이젠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어둠이 신기루처럼 사라졌어요.”

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올해 고희를 맞은 작가 류병엽 씨는 30여 년 전 그 순간, 온몸을 내리쳤던 전율의 힘으로 지금까지 그림을 그려 온다고 했다. 평생 월급을 받은 적 없는 전업 작가의 삶을 지탱해 준 것도 그 순간의 힘이었다.

그는 4∼22일 갤러리현대(02-734-6111)에서 개인전을 마련한다. 5년 만의 나들이인데 타이틀을 ‘큰 그림’전으로 붙인 것부터 색다르다. 100∼500호 크기의 대작 40여 점을 내걸 만큼 ‘큰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 준다.

작품을 보면 고희가 아니라 한창 나이의 작가가 열정을 뿜어낸 것 같다. 화려한 색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색상도 농밀하다. 한 화면에 20∼30가지 색이 각 형상 안에서 똬리를 튼 채 자기 만의 색을 내세우는데 전체적인 어울림은 마냥 조화롭다. 이 같은 다양한 ‘주장’을 커다란 평면에 어울리게 하는 것은 색을 맘대로 ‘요리’할 수 있는 작가의 힘이다. 그는 좋은 그림이란 화면에서 나오는 파워가 관객을 압도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 그림에 너무 빠지는 바람에 마흔 네 살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30대 어느 날에는 그림이 안 돼 한강에 뛰어들려고 한 적도 있다”며 “그런 시련과 고비를 넘겼기에 그림이 저절로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품 기법은 서양화이지만 그 안에 담은 정서는 우리네 토속이다. ‘탑이 있는 마을’ ‘고향의 가을’ ‘인왕산 추경’ ‘가을의 월출산’ ‘탐라 환타지’ 등 제목만 보면 풍경화가 연상되지만 작품은 수많은 색의 향연으로 판타지를 자아낸다.

‘고향의 가을’은 오누이가 감 따는 가을 정경을 담은 작품으로, 미세하게 분할된 화면을 서로 다른 색들이 채우고 있다. 작가는 바탕에 점을 하나 찍는 데도 “어떤 때는 붓이 (캔버스로) 들어가지 않아 애를 먹는다”고 말한다.

‘인왕산 추경’도 도시와 산의 가을 풍경을 담은 작품인데, 다채로운 색면 덕분에 동화 속에서 노니는 듯하다. 특히 빨강 파랑 노랑 등 삼원색을 비롯해 이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흰색도 한 화면에서 어깨동무하고 있다.

작가는 늘 하회탈 같은 함박웃음을 주시던 할머니, 구불구불한 곡선의 논두렁길, 하늘과 맞닿은 고궁의 기와선, 오래된 소나무, 고향인 전북 순창군의 하늘 등이 작품의 바탕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선 최근 6개월간 혼신의 힘을 기울인 1000호 크기의 대작 ‘백두산 천지’를 내놓지 않았다. 작품을 옮기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그는 작품을 쉽게 보여 주지 않는 작가로 손꼽힌다. ‘백두산 천지’는 ‘우리 민족의 밥그릇 의식’을 담겠다는 취지로 그렸는데, 두루미 다섯 마리가 그림에 들어가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류 씨는 홍익대 서양화과를 나와 프랑스 파리에서 6개월간 머무르다 그림이 되지 않아 귀국했다. 나중에 돌아가려 했으나 ‘직업도 없고 수입도 없다’며 다시 여권을 내주지 않는 바람에 꿈을 접었다.

그는 “10년만 젊었어도 다시 파리로 가서 세계 미술의 정상과 ‘박 터지게’ 붙어보고 싶은데, 이젠 한국에서 그림 그릴 시간도 모자란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앞으로 도자기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허 엽 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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