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한국의 해리 트루먼을 待望하며

  • 입력 2007년 3월 30일 19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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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33대 대통령(1945∼53년) 해리 트루먼은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항상 10위 안에 들만큼 미국인들의 추앙을 받는 지도자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겐 별로 인기가 없다. 6·25전쟁 때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통일의 기회를 무산시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자름으로써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분단의 비극 앞에서 우리가 트루먼에게 호감을 갖기는 어려웠다.

지난달 방한했던 역사학자 폴 케네디(예일대)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트루먼 같은 지도자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왜 트루먼일까. “처칠이나 드골처럼 카리스마가 강하거나, 존 F 케네디처럼 정치적 수사(修辭)가 뛰어난 리더보다 (트루먼처럼) 국민에게 확신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리더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트루먼은 비상한 시대에 비상한 결정들을 내린 지도자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을 투하함으로써 종전(終戰)을 앞당겼고, 유엔 창설,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결성을 주도해 전후(戰後) 세계 질서의 초석을 깔았다. 크게 본다면 인류는 트루먼 덕에 유례없이 긴 ‘평화의 시대’로 들어설 수 있었다.

뉴딜 정책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그는 국내정치에서도 많은 진보적 정책을 내놓았다. 페어 딜(Fair Deal)로 총칭되는 사회안전망의 확충, 빈민가와 도시지역 재개발을 위한 주택법 제정, 최저임금 인상, 군대 내에서의 인종차별 금지 등이 그것이다.

역사학자 폴 케네디의 충고

그러나 그는 늘 힘들고 고독했다. 야당과 언론은 미주리 주 시골 출신에 고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사사건건 비판하고 조롱했다. 전임자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마저 부통령이었던 그를 무시해 생전에 외교 현안들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트루먼은 취임 초기 상황 파악에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그는 좀 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 좀 더 풍요롭고 정의로운 미국에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책임도 피하지 않았다.

트루먼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기 빨래는 자기가 할 정도로 청빈했다. 그가 임기를 마친 후 시골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은 경제적으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였다. 당장 수입이라곤 월 112.56달러의 군인연금이 전부였다. 그처럼 형편이 어려웠지만 단 한 번도 ‘전직 대통령’이란 이름을 팔지 않았다. 기업의 고문을 맡아 달라는 청도, 강연 요청도 거절했다. 트루먼은 뒷날 회고록에서 “나는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위신과 고결함을 팔아먹고 싶지 않았다”고 썼다.(제프 자코비,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3월 3, 4일자)

1972년 12월, 88세의 그가 심장혈관 장애로 세상을 떴을 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역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용기와 비전으로 맞섰으며, 선견지명이 있는 리더십은 전후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추모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트루먼에게 빠져들수록 케네디 교수가 우리에게 너무 무리한 조언을 한 듯싶다. 한 언론인은 지금의 대선판을 보면서 “국민은 대어(大魚)의 꿈을 안고 낚싯대를 드리우겠지만 이번에도 잔챙이가 올라올 게 뻔하다”고 자조(自嘲)했다. 정말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아옹다옹하는 것일까. 석학이라는 케네디 교수가 한국의 정치 수준을 너무 높게 본 것일까.

국민에게 확신과 희망 줘야

경선 룰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야당이나, 거론되는 후보만 10명이 넘는다는 여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다. 출마 여부조차 결정하지 못해 강의실과 현실정치 사이를 벌써 수개월째 오가는 사람, 세(勢)가 불리하자 14년간 마시던 우물에 침 뱉고 뛰쳐나온 사람, 자그마한 기업체 하나 경영하다가 갑자기 정치적 현자(賢者) 노릇을 하려 드는 사람까지, 대체 이들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유력 주자들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일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이 대권을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지배욕 때문인가, 아니면 자기희생의 숭고한 사명감 때문인가. 이들에게조차도 트루먼을 닮으라고 한다면 지하의 트루먼을 모욕하는 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변하고, 리더는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이들을 앞세워 장차 한반도에 닥칠 ‘비상한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제라도 한 시대를 떠맡을 수 있다는 확신과 희망을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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