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영희]나의 엉터리 소설 이야기

  • 입력 2007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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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는데,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면서 그의 삶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한다. 가령 운전할 때나 음식점에서 누구를 기다릴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창밖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의 외모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무엇 하는 사람일까, 왜 지금 저기에 있을까, 열심히 상상의 날개를 편다. 조금 독특하게 보인다거나 색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거나 할 때면 내 상상력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발동한다.

어렸을 때 셜록 홈스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다. 아마도 그때 이런 버릇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창작에 대한 내 호기심일 수 있다. 유학 시절 꽤 유명한 소설가에게서 소설작법을 수강했는데 소설의 소재를 찾는 방법 중 하나로, 길에서 재미있는 사연을 가진 듯 보이는 사람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라고 했다. 행동, 말투, 그가 만나는 사람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면 저녁때쯤 소설 한 권을 쓸 만한 충분한 자료가 생긴다는 말이다.

소설 쓰는 일은 오래전에 포기했지만, 난 아직도 사람을 보면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상상하는 버릇을 그대로 갖고 있다. 얼마 전 인터넷에는 ‘하수구에서 검거된 절도범’이라는 기사가 떠돌았다. 벌거벗은 초로의 남자가 하수구 안에서 하반신이 물에 잠긴 채 겁에 질린 얼굴로 있는 사진과 함께였다.

생계형 절도 가슴 아픈 사연들

57세의 남자가 서울 노원구 중계동 어느 병원에서 여자의 핸드백을 빼앗은 뒤, 사람들이 옷을 잡아당기자 옷을 다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하수관으로 도망쳤고, 그 안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차가운 구정물 속에 무려 5시간 동안 있다가 ‘하수관 검사 로봇’까지 동원한 경찰에 붙잡혔다는 기사였다. 체포될 때 남자는 심각한 저체온증으로 몸을 심하게 떨면서도 훔친 핸드백을 움켜쥐고 반항했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초범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못 말리는 내 상상력이 발동했다.

“그 남자는 한때는 꽤 잘나가는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했지만 외환위기 때 파산하고 집도 공장도 모두 잃었다. 그의 인생은 눈 깜짝할 새 파멸로 치달았다. 자연스럽게 친구도 친척도 멀어지고 이젠 노모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지하 셋방에서 산다. 이전에 그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을러서, 약지 못해서, 허황된 꿈을 꾸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 뿐,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깔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신용불량자가 된 건 벌써 오래전, 올해는 경기가 너무 나빠 노점을 해도 하루 5000원 벌이가 힘들었고 전세금이 너무 올라 그나마 살던 곳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암 선고를 받았다. 항암치료 한 번 받을 때마다 30만 원이 든다. 도합 16번을 받아야 하는 항암치료를 네 번 받고 중단한 상태였다.

오늘 아침 아내는 더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꼭 한 번만이라도 항암치료를 더 받게 하고 싶었다. 아내가 다니던 병원에서 서성이는데 어떤 여자의 핸드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있을 돈, 그 돈이면 한 번쯤 더 항암치료를 받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그 백을 낚아챘다. 사람들이 옷을 잡자 엉겁결에 옷을 벗고 뛰었고, 당황한 나머지 하수구로 뛰어들었다. 깜깜한 하수구 속에서 길을 잃고 그는 지옥을 경험했다. 혹독한 추위, 인간으로서의 비애, 죽음보다 더 괴로운 공포. 경찰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은 핸드백과 그 안의 돈뿐.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그는 핸드백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특별사면, 큰죄 지은 사람만 활보

생계형 절도가 외환위기 때 13만 건이었는데 지금은 19만 건이라고 한다. 지난번 울산에서는 냉장고 위의 당근 두 개를 훔치다가 붙잡힌 남자가 있었다. 특별사면이다 뭐다 하여 큰 죄를 지은 부자가 활보하는 세상에 핸드백 훔치고 하수구로 도망갔다 잡힌 도둑이 자꾸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단지 사실무근 엉터리 소설뿐인데….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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