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言品도 대통령의 조건이다

  • 입력 2007년 2월 7일 19시 50분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고사성어 하나씩을 소개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구시입화문 설시참신도(口是入禍門 舌是斬身刀)’는 그때 배웠다. 그 후, 중국 후당(後唐)의 재상 풍도(馮道)가 지은 ‘설시(舌詩)’에 나오는 이 말을 가슴에 새겨 왔다.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

대통령의 말과 연설로 인한 파문이 있을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동양에는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처럼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격언이나 고사성어가 많다. 서양도 다르지 않다. ‘침묵은 금, 말은 은’이라는 속담은 침묵이 말보다 더 값어치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을 아끼라는 뜻이리라.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말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물론 말에 능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직업도 많다. 정치인도 그중 하나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러워하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정말 말을 잘한다. 개인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당대 최고의 연설문 작성자를 옆에 두고, 철저한 준비와 완벽한 연출이 따르기에 가능한 일이다.

노 대통령도 논리적이고 말을 잘한다는 평판을 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왜 그의 말은 늘 자신과 다수 국민의 마음을 베는 양날의 칼이 되는가.

대통령의 말은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과거 정권과 공무원 탓이나 변명보다 스스로 사과하고 이해를 구하며, 다짐과 약속이 주조를 이뤄야 한다. 그런데 그는 성난 얼굴로 존재를 과시하던 야당 정치인 시절의 행동과 ‘반미면 어때’ ‘마누라를 버려야 합니까’식의 ‘안티 어법’을 버리지 못했다.

대통령의 연설은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설득할 좋은 기회다. 홍보 전문가 C 씨는 매주 한 번 정도 기업체 사장이나 임원들을 상대로 설명회(PT)를 한다. 수백만 원짜리 프로젝트 하나를 따내기 위해 20분짜리 PT를 하려면 직원 4명이 하루 6시간씩 일주일을 준비한다. 5분짜리 PT를 위해 일주일 동안 밤샘한 적도 있다. 리허설과 가상 질의응답, 고객의 관점에서 PT 내용을 점검하고 취약점을 찾아 보완하는 건 기본이다. 그래도 상대를 감동시켜 일감을 따낼 확률은 절반도 안 된다.

C 씨는 대통령이 TV에 나와 원고지 220장이 넘는 원고를 임기응변으로 줄여 가며 때우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는 “작은 회사도 저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기숙 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프로도 이런 프로가 없다’고 극찬한 청와대의 ‘전문가 비서진’은 대통령의 연설이 저렇게 되도록 뭘 했을까.

대통령은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외국의 대통령실과 부처 기자실 운영 실태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이 진짜 해야 할 일은 외국 대통령들이 어떻게 연설에 성공했는지 그 비결을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유권자들은 차기 대통령 선택 기준의 하나로 ‘말’과 연관된 자질과 언품(言品)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5년 동안 지겹게 보고 들어야 할 사람의 말이 아닌가. 지금부터 꼼꼼하게 뜯어봐야 한다. 말재주나 연설 능력이 후보 선택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겉만 번지르르한 말재주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성 표현에 속지 않을 정도의 지혜도 필요한 일이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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