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1000만 표의 추억’ 그 함정

  • 입력 2006년 12월 17일 20시 11분


코멘트
2002년 12월 19일 밤.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대권 재수’에 실패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당직자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서울 종로구 옥인동 자택 마당에서 비통하게 외쳤다. “이 이회창이가 노무현에게 졌단 말이야?” ‘병풍(兵風) 조작’ 등 흑색선전에 무너졌다는 억울함의 토로였다. 이튿날 그는 울먹이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가 얻은 표는 1997년 15대 대선 때 993만 표, 지난 대선에서 1144만 표였다. 이 강렬한 ‘1000만 표의 추억’이 암시하는 예감(豫感)대로 그는 2004년 11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사무실을 열었다. 올해 들어서는 정치적 발언을 시작했다.

특히 북한 핵실험 이후의 ‘강연 정치’에서는 변화가 두드러진다. 그는 올봄만 해도 “나는 죄인이다. 다시 정치에 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깜짝쇼라든가 네거티브 캠페인이 지난 대선의 패인”(5일 한나라당 특강),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당시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고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한 문구(선조에게 올린 장계)를 떠올릴 때마다 전율 같은 감동을 느낀다”(13일 경희대 특강)는 발언에서는 결의마저 물씬 풍긴다.

대선 출마에 대한 언표는 확인도 부인도 않는 ‘NCND’로 바뀌었다. 한 측근은 “당내에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일차적 목표이며 대선 출마 여부는 그 다음의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일단 야구장 관중석에서 투수연습장으로 내려와 몸을 풀면서 부상선수가 나오는지 등 상황 변화에 대비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번의 대선 실패는 상대의 득점(得點)이나 반칙보다 이 후보 자신의 실점(失點)의 결과다. 그는 15대 선거 때 이인제 박찬종 씨의 이탈을 막지 못했고 지난번에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손잡기를 거부했다. ‘뺄셈의 정치’를 한 것이다. 한 측근은 “행정수도 이전의 대항카드로 JP가 막판 지지선언을 하기로 했는데 이 총재의 고집으로 무산됐다. 그 결과 고향인 예산을 뺀 충남 전역에서 졌다”고 말했다.

다른 측근은 “대선 막바지에 당직자들이 ‘다된 밥’으로 생각해 선거운동보다 이 후보에게 눈도장 찍느라 분주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가족정치’라 불릴 만큼 선거기획이나 자금조달 등을 가족과 핵심 측근 위주로 한 것도 ‘동원력 부재’를 가져 온 요인이다. 한 참모는 “대선 막판에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보고를 하자 측근들이 전략회의에도 못 들어오게 하더라”고 술회했다. 그 결과가 오늘 빚어지고 있는 국정 혼란과 파탄이다.

더욱이 이 후보의 ‘눈과 귀를 가렸던’ 주요 당직자들은 지금 이명박, 박근혜 두 진영의 핵심 참모로 활약 중이다. 일부는 대선 후 “후보를 잘못 뽑아 졌다”는 말까지 했다. 1000만 표는 ‘이회창 개인이 아닌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라는 얘기였다.

물론 이 전 총재가 자신의 말처럼 ‘비(非)좌파 대연합의 결성을 위한 울타리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 그마저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대선 출마는 안 한다’는 분명한 방침 표명은 해야 한다. 운동장 옆에서 연습 투구를 계속하면서 야구장에서 뛰는 선수들을 돕겠다고 말한들 그 진정성이 전해질 리 없기 때문이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