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이지메’ 고해성사

  • 입력 2006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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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초등학교 4학년생 딸아이가 다니는 일본 초등학교에서 학예회가 열렸다. 4학년생들은 연극 ‘오즈의 마법사’를 무대에 올렸다.

보다 보니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띄었다. 조역들은 그렇다 치고 주인공인 도로시가 장면마다 바뀌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배역마다 복장만 같을 뿐 나오는 아이들은 모두 달랐다.

연극이 진행되는 20여 분간 4개 학급 150여 명 전원이 무대에 올라 한두 마디씩 대사를 하고 내려갔다. 주인공 도로시 배역만 해도 8명이 맡았다.

일본에 온 지 5개월째라 반벙어리 신세인 딸아이의 배역은 ‘오즈의 사람들’. 기껏해야 한두 마디를 단체로 외치는 게 전부였지만 아이는 신이 나 연기를 했다. 마지막에는 4학년생 전원이 무대에 올라 ‘무지개 너머’를 불렀다. 캠코더로 찍느라 열중하던 학부모들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일본 학교가 ‘공평한 교육’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그 실체를 본 순간이었다. 연극의 완성도보다도 모두가 힘을 합해 뭔가를 만들어 가는 데 무게를 두는 정신이 읽혔다.

평소라면 이 ‘해피 엔딩’에서 생각을 멈췄을 터였다. 하지만 요즘 일본을 달구는 ‘이지메(집단 괴롭힘)’ 문제를 떠올리니 조금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날의 그 ‘평등과 협조’의 무대가 현실과는 유리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일본 열도는 집단 ‘고해성사’의 분위기에 빠져 있다. 매스컴에서는 ‘내가 겪은 이지메’, ‘어린 시절 이지메를 반성한다’는 고백들로 넘쳐 난다. 이지메 현상은 ‘어른 사회의 축소판’이라며 이지메 방지를 위해 온 사회가 나서자는 깃발도 사방에서 휘날린다.

사실 집단을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이지메는 일본에서는 그 뿌리가 깊다. 17세기 에도(江戶) 막부는 농민을 통제하기 위해 ‘5호제’를 실시했다. 5가구를 한 조로 해 납세와 방범 등에 연대 책임을 지운 것. 가령 5가구 중 한 집에서 수확이 적으면 다른 집에서 그만큼을 더 내야 하고 한 집에서 도둑질을 하면 5가구 전체가 벌을 받는 식이다.

이런 체제 아래서는 서로를 감시 통제하고 제 몫을 못하는 사람을 구박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예는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좀도둑질을 한 일가를 마을 사람들이 생매장해 버리는 장면일 듯하다. 에도 막부는 또 농민들의 스트레스 발산처로 ‘히닌(非人)’ 등 천민집단을 둬서 마음껏 학대하게 했다.

이런 역사에 더해 부쩍 심해진 교육 경쟁도 이지메를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한 칼럼니스트는 이를 밤 10시 전철에서 만난, 학원에서 귀가하는 초등학생을 통해 소개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는 저녁 식사인 듯 샌드위치와 과자를 꺼내 먹고는 휴대전화 메일을 확인한 뒤 곧바로 게임기를 꺼내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매일 이렇게 늦게까지 다니느냐”고 말을 걸어도 겨우 한마디 대답하고는 다시 게임기를 들여다보는 식이다.

칼럼니스트는 경쟁에 지친 아이들이 휴대전화 등 첨단 기기에 의존해 세상과의 소통을 스스로 끊고 있고, 이지메는 이런 아이들의 스트레스 발산처라고 지적했다. 결국 이지메는 일본 아이들이 표현한 마음의 상처이자 집단적 자학 행위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한국은 어떨까. ‘남을 이겨야 산다’는 잘못된 교육 경쟁의 폐해가 일본에 못지않다. ‘왕따’로 인한 자살 소식도 들린다.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혹시 왕따를 당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처럼 사회 전체가 마음을 모아 반성하고 대책을 강구하려는 노력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일본 초등학교에서 본, 비록 인위적이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평등과 협조의 무대를 경험하게 하는 조그만 노력도 의미가 없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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