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옥자]책을 위하여

  • 입력 2006년 11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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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책은 귀한 존재였다. 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으로 인한 결핍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지만, 특히 책에 대한 목마름은 기억의 저편에 깊게 각인돼 있다. 전후의 학교도서관은 허울뿐, 내가 좋아하던 소설이나 시집 등은 한 학기 동안 다 읽어 버릴 정도로 빈약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 언니나 오빠가 있는 친구에게서 빌리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하룻밤 사이에 읽고 돌려주는 조건으로 오빠 언니의 책을 살짝 빼다 주었다. 중학교 때 이 방법으로 하룻밤에 책 한 권씩 떼었다. 책 속엔 지식과 지혜와 재미가 함께 있었다. 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어서 온갖 잡서를 닥치는 대로 읽어 치웠다. 뒤죽박죽의 남독이었지만 지금의 나의 바탕은 그때 이뤄졌다고 굳게 믿는다.

책에 대한 믿음과 연모를 평생 갖고 있어서인지 책과 함께하는 학자의 길을 걸었고 책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게 된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간행물 윤리상 심사를 맡은 일로 수상자의 소감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는 소명을 다하기 위해 10년째 소신 출판을 해 오던 출판인은 너무 힘들어 이제 고만 접어야겠다고 마음먹자 수상하게 되어 몹시 착잡하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마음의 양식’ 멀리하는 세태

특별상을 탄 ‘TV, 책을 말하다’ 팀의 실무자는 프로의 존속 여부를 고민하고 있었다. 공영방송인 KBS 1TV에서 한때 잘나가던 이 교양프로는 계속 밀려 이제는 심야프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영방송마저 이 지경이라면 다른 상업방송은 말해 무엇하랴 싶다.

우리나라만큼 책을 우대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도 드물다.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지식기반사회였다. 조선 왕조가 국교로 채택한 유교의 근본정신은 평화공존을 위한 문치주의(文治主義)였다. 문치란 글로 다스린다는 뜻이니 글이란 지식을 의미하고 그것은 책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책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이 국가사회 운영의 기초였고 ‘박학다식하다’거나 ‘유식하다’는 말이 인물평에서 최고의 칭찬이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 하여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책을 읽는 것을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였다.

조선시대 국왕은 하루에 세 번,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이라 하여 신하의 강의를 들으며 책을 읽어야만 하였다. 박학다식한 신하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고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라도 그 자신 유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조선 국왕의 운명이었다.

책에서 얻는 지식정보가 사회 운영의 기조로 작동하였던 만큼 책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정책이 중요한 국가정책으로 채택됐다. 18세기 정조대의 규장각은 책의 출판과 그 지식정보를 활용하는 문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세운 대표적인 기구였다. 책과 붓으로 대변되는 문치주의에 기초한 우문(右文)정치의 방향성은 오늘날의 지식기반사회의 지향과 일치한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모색은 무력을 최고 가치로 삼았던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이며 이는 평화를 위한 제언이기도 하다. 인류는 부국강병을 내세우며 지구촌을 전쟁으로 얼룩지게 한 제국주의에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평화를 위한 시대에 지식을 최고 가치로 한다는 것은 결국 책을 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이다. 책과 거기에 담겨 있는 지식이 중요한 생존전략이 됐다.

지식사회 기반은 독서인데…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직면하여 어떻게 하면 국민에게 ‘마음의 양식’인 좋은 책을 제대로 읽힐지 국가적으로 고민할 때이다. 이른바 독서 진흥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 같다. 독서진흥위원회를 만들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위원회공화국이라고 조롱받는 터에 이제 위원회는 더 필요치 않다.

독서 진흥을 위해서라면 이미 있는 간행물윤리위원회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책에 관한 한 상당한 노하우와 숙련된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고 이미 독서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시효가 지난 ‘윤리’ 두 자는 떼어 버리고 책과 독서를 핵심어로 삼는 위원회로 개편해 범국민독서운동이라도 벌였으면 싶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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