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9·11테러’와 ‘10·9핵실험’

  • 입력 2006년 11월 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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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둔다는 말이 있다. 바둑이나 장기에서 오래 생각하고 둔 한 수가 판을 그르친 경우에 하는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의 핵실험 24일 만에 내린 결론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는 핵실험 당일인 10월 9일 “한국 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는가”라면서 포용정책의 한계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달 2일에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균형이 현재까지는 깨지지 않았다”면서 정권이 바뀌어도 대북 포용 외에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했다.

한국 현대사는 북한이 핵실험을 한 10월 9일을 중요한 전환의 기점으로 기록할 것이 분명하다. 핵실험은 김대중 정권 이후 지속돼 온 포용정책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 줬다. 국가외교 및 안보정책의 패러다임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핵실험 이후 노 대통령은 국민 앞에 잘 나서지 않았다. 임기를 1년 이상 남겨 둔 그는 전원주택 전시회를 방문해 퇴임 후의 삶을 구상하고 부인과 함께 주말에 갯벌 나들이를 다녀오는 여유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내놓은 결론이 ‘포용정책 불변’이었다.

역사의 전환기에 지도자의 결단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도자의 진가는 위기 때 발휘되는 법이다.

2001년 9월 11일은 미국 뉴욕 맨해튼 서남쪽 허드슨 강변에 우뚝 서 있던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빌딩이 테러리스트들이 탈취한 2대의 여객기 충돌로 무너져 내린 날이다. 워싱턴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9·11 이전과 이후의 미국은 같은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을 절감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9·11사태를 “미국의 잠을 깨우는 모닝콜이나 다름없었다”고 저서 ‘제국의 패러독스’에서 지적했다. 반세기에 걸친 소련과의 냉전시대를 승리로 끝낸 미국은 지구상의 유일한 슈퍼파워로 1990년대를 여유롭게 보냈다. 일부에서 테러에 대한 경고가 있었지만 무시됐다. 그 결과가 9·11테러였다.

그러나 9·11 이후의 대처에서 미국은 결연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 다음 날 현장의 한 곳인 펜타곤을 방문해 테러범 색출과 응징을 다짐했다. 이어 13일에는 “우리는 21세기의 첫 번째 전쟁을 목도하고 있다”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는 다음 날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에 잠바 차림으로 나타나 메가폰을 잡았다. 대법원 판결로 가까스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그의 지지도는 90%를 넘어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는 이제 고립주의를 탈피하고 위대한 과업을 수행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분열된 여론과 국민을 일치단결시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이 교수는 9·11테러 4년 전에 “미국은 이른바 ‘진주만식 멘털리티(심리)’ 때문에 공격을 받기 전까지 적절한 방어책을 갖추지 못할 공산이 크다”는 정확한 경고를 내보냈다.

우리 사회에도 10·9핵실험을 전후해 수많은 경고가 있었다. 문제는 지도자가 경고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국민을 설득해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도록 할 수 있느냐이다. 과연 국민은 노 대통령이 내린 결론을 최선이라고 받아들이고, 우리는 이제 안전하다고 믿고 있을까.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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