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괴물’과 FTA

  • 입력 2006년 8월 6일 2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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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가 수입 외화에 의존해 연명하던 시절이 꽤 오래 지속됐다. 영화인들은 외화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해 영화관에 걸리지 않고 바로 창고로 직행하는 한국 영화를 찍었다. 1980년대 후반 미국 직배사(UIP)가 한국 영화시장에 진출하자 영화인들은 당장 망할 것처럼 맹렬한 투쟁을 벌였다. ‘직배영화 안 보기’ 운동이 일어나고 직배영화 상영관에 뱀을 푸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한국영화의 자생력(自生力)을 길러준 것은 시장 개방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에 이어 ‘괴물’로 다시 대박을 터뜨렸다. 620개 스크린에서 ‘괴물’이 출몰하는데도 스크린 독점 논란 때문에 필름을 더 못 줄 정도라니, 가뿐하게 ‘왕의 남자’ 기록(1230만 명)을 깰 듯싶다. ‘왕의 남자’가 히트할 때 이준익 감독은 “내 영화가 잘되는 것은 좋지만, 스크린쿼터 축소의 명분을 줄까 봐 걱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 1인 시위에 참여했던 봉 감독도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공이 잘 맞아도 핸디캡 줄어들까 봐 걱정하는 아마추어 골퍼들 같다.

▷스크린쿼터는 자국(自國)영화의 의무 상영 기간을 두는 무역 장벽으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마당에 그대로 둘 수는 없다. 현재 스크린쿼터를 시행 중인 나라는 스페인 그리스 브라질 등 8개국이다. 중국과 인도는 외화수입 규제를 통해 자국영화를 보호한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폐지로 문화 주권이 상실된다고 주장하지만, 배부른 기득권 지키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토종 할인점이 월마트와 까르푸도 이기고, 김밥집이 맥도날드와 버거킹도 맥 못 추게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충격파가 훨씬 컸던 할리우드 영화 직배를 이겨 낸 우리 영화계가 국산영화 의무상영일이 146일에서 절반인 73일로 축소됐다고 해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국내 시장에서 보호막 없이도 할리우드 영화의 공격을 막아 낼 경쟁력을 갖춰야만, 세계시장으로 한류를 뻗게 하는 영화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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