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후지와라]美영향력은 전쟁 안할 때 가장 크다

  • 입력 2006년 4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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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이후 세계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모든 나라가 미국에 순종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전쟁 뒤 상황이 달라졌다.

먼저 북한을 보자. 미국이 이라크전쟁을 준비하기 전부터 핵 개발을 재개한 북한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등의 반대를 물리치고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자마자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하고 있다.

다음은 이란. 미국이 핵 개발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몇 번이나 내고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세 나라가 계속 경고를 했는데도 이란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대통령 시절부터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취임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미국에 도발을 하는 듯한 발언을 되풀이하고 있다.

왜 그럴까. 미국이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는데 이런 나라들이 어떻게 미국에 대항할 수 있을까.

이는 억지(抑止)와 전쟁의 차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미국의 영향력은 억지전략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전쟁을 하지 않을 때 가장 크다. 언제 어디서나 최대 규모의 병력을 이동 배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큰 억지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이 전쟁을 할 때는 억지효과가 약해진다. 전장에 병력이 붙들려 있을 때는 제2의 전장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국에 대항하는 세력의 눈에는 독자적인 행동을 해도 미국이 제재를 가할 가능성이 줄어든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면 병력을 빼 다음 적을 억지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 할수록 제2의 적에 대한 억지 효과는 약해진다.

그리고 군사력이 강해도 전쟁이 단기간에 끝난다는 보장이 없다. 전쟁의 목적이 한정돼 있다면 빨리 목적을 달성하고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의 목적을 과도하게 내건 경우 아무리 군사대국이라도 전쟁의 장기화를 피하기 어렵다.

이라크전쟁은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에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다는 과도한 목적을 내걸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라크에서 ‘정부 만들기’라는 장기 과제를 안게 됐다. 이라크에 안정된 정부가 생겨나고 이라크인의 손으로 치안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미군은 철수할 수 없다. 그리고 이라크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는 한 미국은 제2의 전쟁에 나설 가능성이 적다. 이라크전쟁에 따른 억지효과의 후퇴가 북한과 이란에 행동의 자유를 준 것이다.

북한과 이라크뿐이 아니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의 거리는 이라크전 이후 계속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와 유대를 강화해 중앙아시아에서 상하이(上海)조약기구를 통해 미국과 동떨어진 새로운 세력권을 만들고 있다. 미국의 대외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미국이 전쟁에 나설 때 미국의 영향력은 쇠퇴한다. 이 기괴한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쟁으로부터 외교로 정책의 축을 옮김으로써 억지효과를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 베트남전쟁의 경우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보좌관의 주도로 미중(美中) 접근과 미소(美蘇) 데탕트가 진행됐다. 이 교묘한 외교의 결과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도 중소(中蘇) 양국에 대한 영향력을 오히려 높였다.

부시 정권에는 키신저가 없다. 이라크에서 철수함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정책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정책 전환을 하지 않는 한 미국의 억지효과가 약해지고 국제관계는 불안정해질 뿐이다.

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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