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용린]체벌보다는 마음의 변화 이끌어야

  • 입력 2006년 4월 2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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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장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중고교생들의 일탈행동을 무도인으로서 못 본 척할 수 없어 주의를 주려 했으나 오히려 이들이 대들자 혼 좀 내준다는 것이 폭행 용의자로 몰려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대구의 한 태권도 관장 및 사범에게 일어났고, 최근에는 서울의 한 격투기 체육관장에게도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경찰에 입건됐다. 학생의 부모들이 훈계나 지도의 측면보다는 폭행 쪽에 무게를 두고 무도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누리꾼들의 의견이 뜨겁게 충돌하고 있다. “무도인다운 아름다운 용기”라고 보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유야 어쨌든 폭행은 폭행이니만큼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즈음 기성세대가 비겁해진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청소년들의 일탈을 목도하면서도 못 본 체 지나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괜스레 간섭했다가 오히려 봉변을 당할까 하는 우려 때문에 어른다운 본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무도인들의 행동은 비겁한 기성세대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일탈하는 젊은 세대를 용기 있게 선도해 보고자 했던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일탈하는 청소년을 때려도 되는가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설사 꾸짖을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신체에 치료를 요할 만큼의 폭력을 행사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 아닌가? 한 인간은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어떤 이유로도 사적인 폭행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권사상이 아닌가? 중고교생들이 친구들과 모여 담배를 피우는 등의 일탈에 대한 무도인의 일방적 구타는 훈계의 도를 넘어선 자의적 폭력 과시가 아닌가?

양쪽의 주장은 모두 옳다. 젊은이들의 일탈 행동에 대한 그들의 훈계와 지도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필요한 일이었으며, 아울러 그들의 구타에 대한 항의와 고발에도 충분히 이유가 있다. 하나는 어른의 본분을 다하려 한 것이었고, 하나는 인권의 원칙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체육관장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좋지 않다’는 훈계를 하려던 시도였고, 학부모들은 ‘누구로부터도 폭행을 당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양쪽이 서로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데에서 생긴다. 체육관장들의 훈계와 지도를 선의로 해석하지 않고, 학부모들의 항의를 ‘일리 있다’고 보지 않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서로 상대방의 행동을 선의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 것을 권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관심의 초점을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그런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로 옮겨야 한다는 점이다. 무도인과 학부모의 갈등보다는 ‘학생들의 변화와 선도’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얘기다.

학생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서 온다. 체벌로는 ‘마음의 변화’가 어렵다는 것이 교육학이나 심리학의 오래된 정설이다. 그런 점에서 무도인들의 일탈 학생에 대한 훈계와 지도의 시도는 용기 있고 바람직한 행동이었지만, 그 방법이었던 구타와 체벌은 적절하지 않았다. 학부모들은 무도인들의 폭행에만 관심을 두다가 정작 중요한 학생들의 선도를 소홀히 하는 실수는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청소년 일탈에 대한 지도는 언제나 마음의 변화를 겨냥한 것이어야 하며, 이런 마음의 변화는 강제와 체벌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동과 감화 그리고 모범의 제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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