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모두가 왕의 부하들’

  • 입력 2005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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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스타크는 미국 남부 작은 마을의 젊고 말 잘하는 변호사였다. 그는 정의롭고 순수한 열정으로 마을 학교 부실공사와 관련된 관리들의 부정을 고발했다. 하지만 스타크의 열정과 뛰어난 화술도 마을을 지배하는 관리들의 힘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소방훈련 도중 학교가 무너져 아이들이 사망하자 그의 진심은 인정받게 된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스타크는 승승장구해 주지사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정치적 거물이 될수록 그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진다. 자신에게 아부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부하들(Men)’에게 둘러싸인 스타크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결국 원한을 사 피격당한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죽는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었는데….”

1950년 22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모두가 왕의 부하들(All the King's Men)’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순수한 열정이 정치에 의해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 특히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권력자가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를 잘 묘사한 수작(秀作)이다.

얼마 전 조기숙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고 불현듯 이 영화가 떠올랐다. 조 수석은 충북 청주의 한 할머니가 노무현 대통령 덕분에 집을 마련한 일화를 소개하며 “서민을 향한 대통령의 애정은 멈출 줄을 모른다”고 했다.

조선시대 한 노파가 신문고를 울려 임금이 억울한 일을 풀어줬다는 고사를 생각나게 하는 이 글을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서민’을 ‘인민’으로, ‘대통령’을 ‘장군님’으로만 바꾼다면 북쪽에서 들리는 방송의 한 대목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노비어천가’는 노 대통령 주변이 심각한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함을 보여 준다.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의 ‘노무현 따라잡기’에 이어 전직 청와대 참모가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이라는 책을 펴냈다는 소식은 5공화국 초에 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기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를 생각나게 한다.

노 대통령은 스타크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권력자의 위치에 올랐다. 대화와 소통(communication)에도 능했고, ‘절반의 비망록’에 나오는 것처럼 한나라당의 탄핵 추진을 ‘자충수’로 내다볼 만큼 상황을 객관적으로 읽는 눈도 뛰어났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대통령의 감(感)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열린우리당 의원들 사이에 나온다. 연정론을 밀어붙이고 ‘댓글 달기’에 열중하는 노 대통령이 ‘부하들’의 벽에 갇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주가 사상 최고치 경신 등을 자랑하며 ‘비판 세력의 권력 착란증세’를 운운한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의 독설에서 그런 노 대통령의 심사가 묻어 나온다.

권력 핵심이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듯한 모습을 보는 국민은 불안하다. 헤어진 가족과 만나고 멀어진 사람과도 소통하는 세밑, 이제라도 노 대통령과 그 주변이 마음을 열고 따뜻한 대화와 소통으로 국민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정권 말기에 “세상을 다 바꿀 수 있었는데…”라고 아쉬워하지 않으려면….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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