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86>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1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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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초나라 군사들의 모진 매질과 자신들이 떨어진 처지가 기막혀 괴로운 외침과 구성진 울음을 쏟아내는 것은 구덩이를 파고 있는 남자들만이 아니었다. 초나라 군사에게 끌려간 아버지나 남편을 뒤따라온 여인네들과 아버지나 형을 따라온 아이들도 멀리서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파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함께 비명을 지르고 울었다.

“저것들을 모두 쫓아버려라!”

패왕이 듣기에 성가신 듯 그런 아녀자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군사들이 그리로 우르르 달려가 창대로 그들을 몰아냈다. 그때 그들 중에 한 소년이 패왕 앞으로 달려와 소리쳤다.

“대왕, 제가 한마디 물을 것이 있습니다. 대답해주시겠습니까?”

패왕이 돌아보니 이제 겨우 코흘리개를 면한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워낙 당찬 데다 눈빛도 아이 같지 않게 번쩍이는 것이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창대로 소년을 몰아내려는 군사를 손짓으로 말리고 물었다.

“너는 누구며 몇 살이냐?”

“저희 아버님은 외황 현령의 문객(門客)으로 지금 저기서 구덩이를 파고 계십니다. 저는 열세 살이라 이렇게 죽음을 면했습니다만 그게 반드시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닙니다.”

말하는 품이 열세 살 난 아이 같지 않게 맹랑했다. 그러나 패왕은 짐짓 험한 표정으로 받았다.

“좋다. 네가 과인에게 물어볼 것이 무엇이냐? 네 나이 열셋이라 하나 허튼 수작을 부리다가는 네 아비와 함께 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조금도 겁먹은 눈길이 아니었다. 한결 또렷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대왕께서는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장수로 전장을 떠돌면서 한 세상을 마치시겠습니까? 아니면 민심을 거두어 천하를 얻고 가여운 창맹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십니까?”

“어린놈이 그건 왜 묻느냐?”

“만약 대왕께서 민심을 거두어 천하를 얻고 가여운 창맹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신다면 이렇게 해서는 결코 아니 되십니다.”

“그럼 너는 늙은 도적놈에게 빌붙어 감히 과인에게 맞서온 저 벌레 같은 것들을 살려두란 말이냐?”

“대왕.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팽월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힘으로 외황 사람들을 억누르니 사람들은 두려워서 짐짓 항복한 체하고 대왕을 기다려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새벽 팽월의 졸개들이 모두 달아나자 바로 성문을 열고 대왕께 항복한 것인데, 이렇게 모두 산 채 땅에 묻으려 하시니, 만약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 앞으로 어느 백성이 대왕을 믿고 의지하려 들겠습니까? 대왕께서 기어이 저들을 죽이신다면 천하는커녕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팽월이 차지하고 있던 양(梁) 땅의 성 열 개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항복해봤자 산 채 땅에 묻힐 것이니 두려워서 누가 항복하려 들겠습니까?”

전에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알 수 없게도 그날따라 그 소년의 소리가 패왕의 가슴에 와 닿았다. 어쩌면 싸움이 길어지고 정치적이 되면서 패왕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어떤 이치를 그 소년이 뚜렷하게 만들어준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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