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대사 “큰 흐름에 맡기겠다”

  • 입력 2005년 7월 2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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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주미대사(왼쪽)가 올 2월 중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재외공관장 초청 만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건배하고 있다. 홍 대사는 중앙일보 사장 시절이던 1997년 삼성그룹 측과 대선 출마 후보자에 대한 금품지원 문제 등을 협의한 것으로 밝혀져 거취가 주목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홍석현 주미대사(왼쪽)가 올 2월 중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재외공관장 초청 만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건배하고 있다. 홍 대사는 중앙일보 사장 시절이던 1997년 삼성그룹 측과 대선 출마 후보자에 대한 금품지원 문제 등을 협의한 것으로 밝혀져 거취가 주목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MBC가 1997년 대선 당시 홍석현(洪錫炫·현 주미 대사) 중앙일보 사장의 ‘정경언(政經言) 유착 행위’를 담은 이른바 ‘X파일’의 전모를 보도하자 22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은 깊은 침묵 속에 빠졌다. 26일부터 재개되는 제4차 6자회담 참석을 위해 북한 대표단이 베이징(北京) 국제공항에 내리고, 미국 측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23일 회담장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은 ‘서울발 홍석현 쇼크’에 묻히고 말았다.

전날 법원이 홍 대사와 이학수(李鶴洙)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1997년 당시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이 낸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직후만 해도 “사건의 본질은 국가기관의 불법 도청인데 본말이 전도됐다”고 얘기하던 대사관 관계자들도 입을 닫았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21일 오후 대사 집무실 앞에서 한국 특파원들을 만난 홍 대사가 “여기(워싱턴) 올 때도 내 뜻대로 온 게 아니다. 앞으로도 큰 흐름에 맡기겠다”고 말한 대목을 다시 곱씹는 모습이다.

두 눈 주위가 약간 충혈됐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홍 대사는 기다리고 있던 특파원들에게 또 “내 인생에 어느 게 중요한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대사라는 자리가 국가를 대표하는 만큼 지금 같은 시기에 홍 대사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지는 못할 것이고, 결국 청와대의 결심에 따르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놨다.

한 관계자는 “주미 대사 직은 다른 자리와는 좀 다르다. 미국이라는 우리에게 특수한 상대국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고, 중도하차한다면 마치 국내 상황을 인정하는 듯한 것으로 워싱턴 외교무대에 비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MBC의 22일 보도 이후 대사관 주변에서는 홍 대사가 부임한 이후 청와대가 보인 태도를 되돌아보며 향후 거취를 점치는 얘기들도 없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홍 대사가 부임한 이후 재산등록 과정의 문제점과 유엔 사무총장 출마 얘기를 둘러싸고 파문이 잇따랐는데도 참여정부 내에서는 홍 대사를 보호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홍 대사도 여권 내의 기류가 뭔가 ‘자신의 기대’와 달리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듯했다. 그는 특파원들이 ‘왜 지금 이 시점에 도청테이프가 문제가 된다고 보나’라고 묻자 “생각하는 바가 있지만 맞지 않을 수도 있어 말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고…”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홍 대사는 열흘 전쯤에도 “김대중 정권 초기에 안기부에서 녹음테이프 수백 개가 흘러나와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중에 나와 관계된 것만 요즘 (소문이) 나도는 건 이상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권 내 음모론을 암시하는 듯한 얘기였다.

동정론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영자신문을 통해 사정을 알고 있다는 대사관의 한 미국인 직원은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이 벌어졌을 때 미국인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업무성과와 개인의 문제를 구분했다”며 “사실관계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홍 대사를 이곳에 보낸 목적을 먼저 달성하도록 하는 일도 중요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사임을 부른 워터게이트 사건도 핵심은 ‘도청 사건을 닉슨 대통령이 보고받고 알고 있었느냐’ 여부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인사 검증 시스템 구멍▼

안기부 녹취록 공개로 홍석현 주미대사가 1997년 대선 후보들에 대한 삼성그룹의 자금 전달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의혹이 드러나면서 그의 대사 발탁 배경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청와대는 22일 “홍 대사를 주미대사로 임명하기 전의 검증 과정에서는 불법 대선자금 전달 의혹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홍 대사가 여야를 넘나들며 돈을 전달하는 등 복잡한 정치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청와대가 몰랐다면 검증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알고도 홍 대사를 발탁했다면 그 배경에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개연성이 크다.

특히 홍 대사의 대선자금 관련 의혹은 1999년 12월 당시 천용택(千容宅) 국가정보원장이 “홍석현 씨가 정치자금법 개정(1997년 11월) 이전에 당시 국민회의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게 돈을 전달했다”고 말해 이미 불거진 적이 있다. 홍 대사도 당시 “삼성의 부탁을 받고 개인적으로 한 일”이라고 시인했다.

청와대가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검증할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홍 대사는 전문 외교관 경력이 전혀 없고 권력과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중앙 일간지 사주란 점도 임명 과정에서 논란이 됐었다.

지난해 12월 홍 대사 내정설이 나왔을 때 일부 야당과 언론단체들은 ‘신(新)권언유착’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나 청와대는 개의치 않았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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