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희]익명의 그늘

  • 입력 2005년 6월 16일 03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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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워터게이트 사건의 ‘딥 스로트’가 30여 년 만에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면서 분위기가 꽤나 바뀌었다.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한 언론 보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논란을 두고 하는 얘기다.

원론적으로야 아주 분명한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 “취재원 보호, 사생활 보호 등의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해 익명 표기를 적용한다.”(동아일보 스타일북) 불가피한 경우에 제한적으로만 취재원을 익명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뉴욕타임스가 재작년 자사 기자의 기사 조작 사건을 스스로 공표한 뒤 ‘조작 우려가 있는 익명 취재원의 사용’을 최대한 줄이겠다고 밝히더니, 지난달엔 뉴스위크의 관타나모수용소 코란 모독사건 보도를 계기로 ‘익명 제한’의 원칙이 더욱 힘을 받았다.

세계의 언론사들이 앞 다퉈 맞장구치며 제한에 제한을 더했다. 맞는 말이고, 제대로 된 방향이다. 언론이 무슨 뒷골목의 대장이라고 익명의 그늘에 숨어 부정확하거나 자의적 판단이 스며든 표현으로 독자를 현혹할 수 있겠는가. 이 대명천지에.

그러나 마크 펠트 전 미국연방수사국 부국장의 커밍아웃은 익명-실명 논란을 반전시키는 계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이 권력이 개재된 사안에 과연 실명제 보도가 얼마나 가능할지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익명 소식통의 오남용 논란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잘못을 밝혀내기 위해(to blow the whistle on wrongdoing) 때로는 이것이 유일한 길일 수도 있다.”(워싱턴포스트)

그 대상이 정치권력이건 경제권력이건 조직형 비리에서는 내부고발자가 없으면 언론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기자가 내부의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보다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조력이 없이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쓸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자의 경험으로 봐도 그렇다. 민자당 연수원 비밀매각(1992년), 국내 정유사들의 담합 비리(2000년) 같은 일들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당시 그 일이 그렇게 진행돼선 안 된다고 판단한 관계자들이 정보를 제공한 결과였다. 요즘의 행담도 개발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이 대목에 ‘언론의 공공연한 비밀’ 한 가지가 있다. 기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상대방 말의 맥락과 그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처지까지 헤아릴 줄 아는 ‘들을 귀’다. 그 능력과 자세가 신뢰할 만한 것으로 다가올 때 취재원은 비로소 위험을 감수하며 기꺼이 내부고발자가 되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선 필생의 ‘공든 탑’을 걸기도 한다. 기자가 잘나서 감춰진 비밀과 구조적 비리를 찾아내고 고발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취재원과 언론이 맺은 이런 신뢰의 커넥션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취재원이 호각(whistle)을 불어 음모와 어리석음의 우산을 날려버리기까지 번민을 거듭했을 그 시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나의 몇 안 되는 딥 스로트 중의 한 사람에게 오랜만에 전화해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해야겠다. 그리고 당시 마음 졸이면서도 짜릿했던 공모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때 나의 ‘들을 귀’는 몇 점쯤이나 되었느냐고.

김창희 국제부장 ins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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