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2년 괌서 日패잔병 발견

  • 입력 2005년 1월 23일 18시 08분


코멘트
미국령 괌 탈로포포 마을. 냇가에서 새우잡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두에나스와 데그라시아 형제는 언덕 위에 괴상한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1972년 1월 24일,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었다.

“누구야, 손들어! 움직이지 마!”

엽총을 든 형 두에나스가 고함치자 그 물체는 자리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되풀이했다.

오후 9시. 마을 행정관은 괌 경찰국에 “주민들이 일본군 패잔병을 잡은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일본말을 하는 주민이 불려 왔다. 경찰서로 향하는 동안 패잔병은 많은 것을 밝혔다.

이름은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 일본군 병장으로 괌에 도착했다. 미군이 괌을 점령하자 대나무 숲에 굴을 파고 숨었다. 나무열매와 덩이줄기 등으로 연명했고, 나무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다른 두 명의 패잔병도 숨어 있었지만 8년 안에 죽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요코이는 영웅이 됐다. 친척들의 축하 속에 결혼식을 올렸고, 당시 각광받던 여행지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자신이 27년이나 숨어 지내던 괌이었다.

2년 남짓 지난 1974년 3월, 이번에는 필리핀 루방 섬에서 ‘일본제국 소위’라고 신분을 밝히는 오노다 히로오(小野田寬郎)가 일본인 청년과 마주쳤다. 그는 “상관의 명령이 있어야 귀국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전 상관 다니구치 소령이 찾아와 작전 종료 명령을 내린 뒤에야 그는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똑같이 패잔병으로 숨어 지냈지만 둘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오노다는 “두 사람의 대담을 기사화하고 싶다”는 언론사들의 빗발치는 요청을 거절했다. 나라에서 받은 총검을 녹슬게 한 인간과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발견될 때까지 총검을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한때 세계를 휩쓴 국가주의의 희생양이었지만, 최소한 한 사람은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오노다에게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고 떠드는 극우파들도 망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코이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다가 1997년 세상을 떠났다. 오노다는 브라질로 건너가 목장을 경영해 큰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