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8년 사진작가 유진 스미스 출생

  • 입력 2004년 12월 29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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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란 기껏해야 하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사진은 사람들에게 이성의 소리를 듣게 하고, 이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며, 때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찾도록 이끈다. 사진은 하나의 작은 목소리이지만 잘 구성하면 그 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

윌리엄 유진 스미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보도사진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가 1918년 12월 30일 태어났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뉴스위크 기자로 사회에 나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도사진 한 분야만 고집했다.

1936년 미국에서 ‘라이프’지가 창간되면서 포토저널리즘 시대가 열린다. 그전까지 글의 보조 역할에 불과했던 사진이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장의 사진이 서로 엮이고 편집되면서 사진만으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스미스는 이런 흐름의 선두에 있었다.

스미스는 자신을 이상주의자라고 불렀다. 그 이상은 현실 한가운데에 굳게 발을 딛고 선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기자로 나섰을 때 그는 전쟁의 가장 한복판에 있기를 원했다. 육지에서, 바다에서, 공중에서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전쟁을 관찰했다.

그가 찍은 ‘유일한 생존자’는 제2차 대전을 다룬 수많은 사진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사진으로 평가된다. 1944년 7월 미군의 화염방사기로 초토화된 사이판의 한 동굴. 수백 구의 주검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갓난아기를 미군 병사가 소중하게 안고 있는 장면. 전쟁과 생명에 대한 기막힌 역설이 담긴 이 한 장의 사진에 세계는 숙연해졌다.

미나마타병을 취재하기 위해 1972년 일본에 갔을 때는 생생한 모습을 담기 위해 2년간 환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 과정에서 수은 폐수를 흘려보낸 공장 직원들에게 얻어맞아 실명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온 사진이니 고집스러울 정도로 집착을 보인 건 당연했다. 그는 상업주의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그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라이프의 전속 사진가 자리를 몇 번이고 그만뒀다. 라이프와 완전히 결별한 건 ‘알베르트 슈바이처’라는 작품 때문. 보통사람으로 묘사하려던 자신의 의도와 달리 편집자가 마음대로 사진을 고르고 편집해 슈바이처 박사를 성자(聖者)로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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