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근]‘黨同伐異’가 증오 키운다

  • 입력 2004년 12월 26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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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이 교수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올해의 정치 경제 사회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자성어로 ‘당동벌이(黨同伐異)’가 꼽혔다고 한다. 당동벌이란 ‘후한서 당고전(黨錮傳)’에 나온 말로 후한 때 환관들의 전횡에 사대부들이 연합하여 대들자 사대부들이 붕당을 지어 조정을 비방한다고 받아치며 싸운 데서 기원한다. 직역하자면 생각이 같은 자들은 편들어주고 생각이 다른 자들은 친다는 뜻이다.

▼집단충돌로 소란했던 한해▼

아마도 2004년에는 대통령 탄핵, 수도 이전, 그리고 이른바 ‘4대 법안’ 등 첨예한 쟁점 사안이 유독 많았기 때문에 많은 교수들이 이를 선택한 듯싶다.

니체의 말대로 자기 확장에의 의지가 삶의 근원이라면 ‘당동’은 자연스러운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모든 쟁점은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가운데 민주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모토였으므로, 같은 사안이라 하더라도 갈등의 양상이 더 첨예하게 발전하였거나 또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문화란 자연과 인간의 표면이 맞닿은 곳에서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이 맞닿은 표면에서도 느껴지는 법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진보’ 측의 집권이 우리 역사상 처음이었던 만큼 정부와 국민이 맞닿은 부분에서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약간의 생소한 문화적 마찰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뜻이다.

생존이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문제에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니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대처하자거나 편들어 주자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리라. 단지 문제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는 ‘벌이(伐異)’를 통해 ‘당동(黨同)’을 꾀하자는 책략에 있다. 즉 철저한 이해관계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부화뇌동을 부추겨 세를 키우려는 것이 작금의 경향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도 둘로 갈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각 방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증오를 증폭시킨다. 기실 증오란 사실에 근거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맹목적인 ‘벌이’에 매우 효과적이고, 따라서 견고한 ‘당동’을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게 된다.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문화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당동벌이 전략이 저절로 무력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군밤에서 싹이 나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이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동질 속에 고루 섞여 있으면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분리해 한 곳에 모아놨을 때 부작용이 발생하는 법이다. 중국도 소수민족을 이웃에 함께 두고 살았을 때엔 종족갈등이 없었지만, 중국을 한데 모으기 위해 이들을 경외로 내쫓았을 때 만리장성을 계속 쌓아갈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그들에게 나라를 잃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동’ 행위는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외연을 확장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런다고 상대방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여야가 부득이 4자회담이라는 형식의 협상을 벌이고 있다지만 소수의 실체를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당동에 지나지 않는다. 강이 길어봤자 사흘 흐르는 거리를 넘지 못하고, 폭풍우가 휘몰아쳐봤자 아침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부화뇌동 않는 소신 존중을▼

안회가 죽자 공자가 예를 어기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란 남이 지켜보는 것이지만 애절한 슬픔은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표출되는 법이다. 이러한 진솔함 속에 당동벌이는 설 곳이 없다. 지난 한 해 우리는 매우 소중한 문화적 갈등을 경험했다. 사람들의 생각이 내 생각 같지 않다는 타자의 개념이 갈등을 통해 인식된 것이다. 이제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명함으로써 뇌동하지 않는 일만 남았다. 그렇지 않으면 당동벌이는 또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근 서강대 교수·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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