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용희/‘막말의 시대’

  • 입력 2004년 6월 18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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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밀을 하나 알고 있는데 말하고 싶다. 이것은 당신들만 알기 바란다. 사실을 말하자면 폭력적 말(言)은 굶주린 새떼라는 점이다. 이 새는 사람들의 귀에 내려앉아서 사람의 체온과 꿈을 빨아들인다. 조직폭력배가 하는 협박적이고 공갈 섞인 말을 듣고 나면 실제 얻어맞은 듯한 물리적 통증을 느낀다. 모욕적인 말을 듣고 나면 온 몸의 피가 말라버리는 것 같다.

▼“목 치겠다” “계급장 떼고…”▼

동양에서 ‘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노자 도덕경 첫 대목에 나오듯 말은 뱉어지는 순간 그것의 진실이 오염되어 버린다고 생각했다. 동양에서 말은 그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감추어지곤 했다. 짧은 말과 긴 침묵, 여운과 명상. 동양에서는 말을 아끼고 이심전심으로 마음의 진실을 전하고자 했다. 말은 언제나 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그 ‘결여’를 숙명적으로 담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은 하는 사람의 인격과 세계를 담고 있다는 보편적 믿음이다. 말은 세계와 교섭하고 세계를 재구성한다. 정치인들은 그들이 하는 말에 의해 그들의 소신과 신념을 드러낸다. 수천년 전 그리스 민주정 시절 정치가들은 백성을 설득하기 위해 수사학을 발전시켰다.

어떤 식으로 말할 것인가. 지도자가 “막 하자는 겁니까”라고 말할 때 말은 마치 마구 해도 되는 것 같았다. 하여 “대통령 해먹기 힘들다”는 말이나 국민을 담보로 “재신임받겠다”는 말도 함부로 나올 정도가 됐다. 최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론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검찰총장은 “내 목을 치겠다”고 중수부 폐지에 강력 반발했고, 그 다음날 대통령은 검찰총장을 비판했다. 대통령은 “검찰총장 임기제는 강한 발언권을 행사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와 별도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논란과 관련해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원은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말하자”고 했다. ‘막말’을 하자는 것인가.

한때 강요된 침묵의 시대를 살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말을 발설하는 것만으로 어딘가로 끌려가는 시기가 있었다. 반대로 이 편이냐 저 편이냐 선택을 강요당하며 말을 토설해야 하던 때도 있었다. 이념의 시대에 침묵은 기회주의자나 회색분자의 비겁함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는 자신의 분명한 의사를 드러내는 때를 맞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소통하려 하고 있다. 이제 누구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한다. 그러나 때로 지나친 까발림이나 직설적 언사는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게도 한다.

대통령은 2002년 12월에 수도 이전의 합의점을 국민투표에서 찾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국회가 여야 합의로 행정수도특별법을 통과시켰으니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투표도 공약일진대, 대통령은 국회의 법 처리를 기다리지 말고 국민투표를 자청했어야 옳다는 점에서 지금의 상황론은 아전인수 격이다.

나는 금도(襟度)라는 말을 떠올린다. 선비의 폭넓은 소맷자락처럼 남을 받아들일 만한 도량과 지조 있는 인격을 뜻한다. 지도자다운 금도가 필요하다. 좀더 정치인다운 말의 품위와 격조와 위트를 원한다.

▼격조 찾기 힘든 지도층 언행▼

사실 정치인의 말에서 전후 맥락을 물리치고 특정 부분만 떼어내 헤드라인으로 잡는 일부 언론의 선정성도 과히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마을에 말더듬이가 살았다. 동네 애 하나가 그 애를 흉내 내며 놀리다가 그만 자기도 말더듬이가 되었다. 언론이 정치인의 말을 따라하다 스스로 인신 공격적 폭언을 하게 될까 두렵다.

무릇 대패질을 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길어야 한다고 한다. 말을 하는 시간보다 말을 생각하고 사유하는 시간이 더 길어야 한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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