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76>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11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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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쓴 원숭이(12)

“두꺼운 널판과 나무 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땅굴이라 불만 지르면 타서 무너져 내릴 것이오. 그리되면 모든 게 잿더미 속에 묻히게 되어, 누구도 진나라와 시황제의 어리석음을 본받지 못하게 할 수 있소.”

그러면서 항우는 기어이 병마용(兵馬俑)이 가득한 땅굴들에 짚단과 마른 섶을 던져 넣어 불을 지르게 했다. 그 바람에 부서지고 그을린 채 땅속 깊이 묻혀버린 병마용은 200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한 농부에게 발견되어 온 세상을 감탄시키게 된다.

아무런 재보도 생기지 않고 대의명분에도 크게 이로울 것 없는 방화로 한나절을 보내서인지, 그날 이후 항우의 내부에 억눌려 있던 파괴와 부정의 열정은 한층 뜨겁게 타올랐다. 함양으로 돌아간 항우는 돌연 그때까지 남겨두었던 진나라의 궁궐들도 모조리 태워버리게 했다. 아울러 장졸들에게 또 한 차례 파괴와 약탈을 허락하니, 절로 도륙(屠戮)이 잇따라 함양 거리는 그대로 불타는 생지옥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항우는 그동안 모은 재물과 보화를 여러 수레에 나눠 싣고 새로 얻은 여자들과 부로(부虜)들을 몰아 함양을 떠났다. 새롭고 살기 좋은 세상을 기대하고 있던 진나라 사람들은 그 같은 항우에게 크게 실망했다. 패공의 너그러운 다스림을 경험한 지 오래지 않아 항우의 파괴와 약탈이 더욱 끔찍하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항우는 그런 민심에는 눈도 끔벅하지 않았다. 동쪽으로 물러나 원래 진을 치고 있던 홍문(鴻門)에 다시 자리를 잡고 멀리 팽성에 있는 회왕(懷王)에게 사람을 보냈다. 겉치레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임금인 회왕에게 이긴 소식을 전함과 아울러 다음 일을 명받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때 신풍(新豊) 부근에는 한씨 성을 쓰는 서생[한생]이 하나 있었다. 스스로 유세가(遊說家)인 양 행세하며 항우를 찾아와 말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함양을 버리고 이리로 돌아오셨습니까?”

“나는 장차 동쪽으로 돌아가 조상 때부터 살아온 서초(西楚) 땅에 자리 잡으려 한다.”

그러자 한생은 열을 올려 항우를 달랬다.

“대왕께서 한 제후로서 사해(四海)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평온하게 사시겠다면 또 모르거니와, 큰 뜻을 품고 천하를 굽어보려 하신다면 동쪽으로 돌아가셔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여기 이 관중(關中)은 사방이 험한 산과 물로 막혀 있고 땅이 기름지니 한 나라의 근거지가 될 만한 곳입니다. 진나라 천년이 우연한 일이 아니며, 시황제가 천하를 아우를 수 있었던 것도 이 땅의 그 같은 지리(地利)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큰 뜻을 이루시려면 대왕께서는 부디 이 땅을 버리지 마십시오. 관중에 자리 잡고 함양을 도읍으로 삼아 힘을 기르시면 반드시 패업((패,백)業)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항우가 들어보니 그럴듯한 데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함양의 궁궐은 모두 불태웠고, 그곳 사람들까지 마구 죽인 뒤라 다시 함양으로 돌아가기에는 뒤가 켕겼다. 거기다가 그가 거느린 장졸 대부분은 초나라에서부터 따라온 터라 한결같이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항우 자신도 어렸을 적 고단하게 쫓기며 살았지만 그래도 고향인 초나라 땅을 누구보다 그리워하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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