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7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13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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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쓴 원숭이(13)

“사람이 저마다 공업(功業)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은 고향 땅과 사람들에게 자랑을 삼기 위함이다. 부귀해진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아니 하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금의야행]과 같으니, 누가 그 부귀함을 알아주겠는가.”

항우가 그렇게 말하며 한생(韓生)의 유세를 물리쳤다. 초나라 땅에 원래 있던 말을 빌려 쓴 것인지, 항우가 처음으로 쓴 비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부터 금의야행(錦衣夜行)이란 고사성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냉대를 받고 쫓겨난 한생은 군문(軍門)을 나서면서 항우의 군막 쪽을 돌아보고 빈정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갓을 쓰고 있는(沐후而冠) 것이나 진배없다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저 원숭이 대왕의 앞날이 훤히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누가 그 말을 듣고 항우에게 일러바쳤다. 한생의 말을 전해들은 항우는 몹시 화가 났다. 제 성품을 이기지 못해 정말로 갓 쓴 원숭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한생을 잡아들이게 한 뒤 가마솥에 삶아 죽인 일(烹殺)이 그랬다.

한생은 그 몸이 익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항우를 비웃고 꾸짖기를 마지않았다고 한다. ‘초한춘추(楚漢春秋)’나 ‘양자법언(楊子法言)’에는 그리 죽은 사람이 한생이 아니라 채씨 성을 쓰는 서생(蔡生)이라고 나와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항우가 한생을 삶아 죽이고도 분이 덜 풀려 불콰해 있을 때 팽성에 사자로 갔던 사람이 돌아와 회왕의 뜻을 전했다.

“관중(關中)의 일은 약조대로 하고, 그 나머지는 상장군의 뜻대로 처결하라. 나라는 밖으로부터 다스릴 수 없는 것이고, 군중(軍中)의 일은 안으로부터 간섭받아서는 아니 된다 하였으니, 그곳의 모든 일은 오직 상장군에게 맡길 뿐이다.”

회왕은 일견 모든 것을 항우에게 맡기면서도 관중의 일만은 슬며시 패공을 편들고 있었다.

“회왕은 우리 집안에서 임금으로 세웠다. 쌓은 공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어찌 주인처럼 모든 일을 주무르려 드는가!”

항우는 그렇게 분통을 터뜨렸으나 당장은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이미 패공 유방과도 홍문에서 화해한 셈이라 따르는 장졸들에게도 드러내놓고 그 일을 불평할 낯이 없었다. 범증과 며칠 이마를 맞대고 의논을 맞춘 뒤에 여러 장수와 제후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처음 천하에 크게 난리가 일어났을 때 각국은 우선 옛 제후의 후예들을 왕으로 세워 진나라를 쳐부수게 했소. 그러나 단단한 갑옷에 날카로운 무기를 잡고 앞장서 싸운 것은 여러 장수들이나 나처럼 포의(布衣)로 일어난 이들이었소. 그 뒤 비바람을 맞으며 들판에서 지내기를 3년, 마침내 진나라를 쳐 없애고 천하를 평정한 것은 모두 여러 장수들과 나의 힘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회왕을 잊어버릴 수는 없소. 비록 싸워 이룬 공은 없으나, 땅을 나누어 근기(近畿=직할 영지)로 삼게 하고 황제로 떠받듦이 마땅할 것이오.”

그리고 여러 장수의 동의를 받아 먼저 회왕을 의제(義帝)로 올려 세웠다. 하지만 의(義)는 의(擬)와 통하니 의제는 이름뿐인 황제란 뜻도 가진다. 의붓아버지나 의붓자식을 의부(義父) 의자(義子)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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