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이동순, '양말'

  • 입력 2003년 11월 28일 1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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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을 빨아 널어두고

이틀 만에 걷었는데 걷다가 보니

아, 글쎄

웬 풀벌레인지 세상에

겨울 내내 지낼 자기 집을 양말 위에다

지어놓았지 뭡니까

참 생각 없는 벌레입니다

하기사 벌레가

양말 따위를 알 리가 없겠지요

양말이 뭔지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집짓기가 급해서

이것저것 돌볼 틈이 없었겠지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양말을 신으려고

무심코 벌레집을 떼어내려다가

작은 집 속에서 깊이 잠든

벌레의 겨울잠이 다칠까 염려되어

나는 내년 봄까지

그 양말을 벽에 고이 걸어두기로 했습니다

-시집 '가시연꽃'(창작과 비평사)중에서

마음이 환해집니다. 참 잘하셨어요. 사람이 신으면 하루 신는 양말이지만 벌레가 묵으면 한 계절을 날 테니까요. 벌레가 생각 없다뇨.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토록 많은 인간들이 벌레를 한낱 벌레로 여겨 제초제를 뿌려왔는데요. 수많은 산을 헐고 들을 뭉개 무수한 벌레들의 보금자리를 지워왔는데요. 구원(舊怨) 다 잊고 천연덕스럽게 당신의 양말에 집을 짓다니 벌레지만 얼마나 큰 배포입니까.

벌레와 당신이 맺은 작은 화해 하나로 인해 올겨울이 한층 따뜻할 듯합니다. 저도 구멍 난 양말 하나 꺼내 처마 밑에 매달아 놓으면 글쎄, 이 도시에도 풀벌레 하나쯤 깃들는지요.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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