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담화의 놀이들'…여담, 그 발칙한 상상력의 바다

  • 입력 2003년 8월 29일 18시 45분


귀스타브 도레의 '돈키호테와 비스카야인의 싸움'(1869). 돈키호테가 비스카야인과 결투하며 서로 칼을 내려치는 결정적 순간, 이야기는 중지되고 '여담'이 끼어든다. 여담은 이렇게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며 '의도된' 일탈을 만들어낸다. -사진제공 새물결
귀스타브 도레의 '돈키호테와 비스카야인의 싸움'(1869). 돈키호테가 비스카야인과 결투하며 서로 칼을 내려치는 결정적 순간, 이야기는 중지되고 '여담'이 끼어든다. 여담은 이렇게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며 '의도된' 일탈을 만들어낸다. -사진제공 새물결
◇담화의 놀이들/란다 사브리 지음 이충민 옮김/640쪽 2만9000원 새물결

고전적 분위기의 흑백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키스를 나누는 숨 막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키스하는 연인들 뒤쪽으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관객들은 침을 꼴딱 삼키며 키스 장면에 몰입해 있는데, 유독 바퀴벌레를 보며 키득키득 웃는 젊은 여자가 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장난기와 즐거움이 가득하다.

영화 ‘아멜리에’의 한 장면이다. 아멜리에가 보았던 영화에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공존한다. 연인들의 키스와 바퀴벌레의 방황이 그것이다. 감독이 표현하고 싶었고 관객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당연히 연인들의 키스일 것이다. 반면 또 다른 이야기인 바퀴벌레의 방황은 감독의 무능력과 무성의함을 대변하는 NG장면이고, 주제와 상관없이 끼어든 쓸데없는 여담(餘談)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필름을 버려야 했을까. 온전한 키스신만 다시 촬영했다면, 영화가 지금보다 나아졌을까. 아닐 것이다. 아마 극장을 나선 어느 누구도 다시는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키스는 영화에 셀 수 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영화의 키스신이 유독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유연하면서도 코믹하게 벽면을 가로지르던 바퀴벌레의 움직임 때문이다. 바퀴벌레가 연출한 ‘여담’이 영화를 살린 셈이다.

이 책은 언제나 문학작품 내부에 존재했지만 정당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주변에 머물러야만 했던 ‘여담’에 관한 연구다. 소설을 읽다보면 불쑥 끼어드는 작가의 목소리, 중요한 것 같지도 않은 배경에 대한 장황한 묘사,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도덕적 논평, 스토리와 상관이 없는 철학적 주제에 대한 설명 등이 모두 문학적 여담에 속한다. 작품 속의 모든 요소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전체 주제를 향해 집중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여담이란 주제로부터의 이탈이며 불필요한 사족일 수밖에 없다. 여담은 투명하게 표현돼야 할 주제를 흐려놓고, 통일성을 갖추어야 할 작품구성을 흐트러뜨리기 때문이다.

여담은 방황하는 바퀴벌레를 닮았고, 또한 그와 유사한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여담이 작품에 요구되는 엄격한 구성을 파괴하고 경제적 서술을 조롱하는 역할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여담은 작품의 구성에 관여하는 원천적 힘이다. 여담을 통해 글쓰기 행위를 의식하고 있는 작가의 내밀한 자의식이 드러난다. 또한 여담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양하고 이질적인 언어가 형성하는 대화적 관계를 통해 작품이 구성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다. 여담은 기존의 관습적 한계로부터 탈주함으로써 새로운 수사학적 원리를 생성하는 근원적 운동성인 것이다.

이 책은 문학적 여담의 중요성에 주목하지만 여담을 작품성의 기준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뻔히 눈으로 읽고 있으면서도 해석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여담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무관심을 반성적으로 환기시킨다. 그리고 여담에 주목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보다 자유로운 독서와 풍요로운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담이 작품 속에서 뛰놀고 방랑하는 언어들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그 흐름에 몸을 맡겨 자유롭고 전복적인 상상력의 놀이를 마음껏 펼쳐보는 것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경험이 아닐까.

이 책에는 또 다른 ‘여담’이 숨어 있다. 세밀하게 공을 들인 본문 번역에 곁들여진 옮긴이의 주석과 용어해설이 그것이다. 과문한 필자가 서사학(敍事學) 서적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역자의 ‘여담’ 덕분이었다. 역자의 노력과 배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tympa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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