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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22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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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년 전 제주 차귀진 해안에 네덜란드 무역선 스페르웨르호가 표착했다. 이 배는 1653년 7월 30일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바타비아항을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향하던 길이었으나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것. 8월 16일 제주에 도착한 스페르웨르호의 선원 중에는 후일 네덜란드로 돌아가 ‘표류기’를 쓴 하멜도 포함돼 있었다. 하멜과 그 일행은 조선에서 13년28일간 생활하다 1666년 9월 14일 일본으로 탈출했다.
하멜 일행은 처음 제주에서 10개월간 머물렀다. 제주 목사 이원진은 이들을 호의적으로 대했고 광해군 유배지를 처소로 내렸다. 1654년 6월에는 한양으로 이송돼 1656년 3월까지 머물렀다. 호패를 받고 훈련도감에 배치돼 군인 신분이 됐지만 실제로는 잡역에 종사했다. 때로는 고관대작의 집에 초대돼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하멜 일행 중 2명이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청나라 사신을 찾아 본국 송환을 호소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이들은 전남 강진으로 유배된다. 이후 남원 순천 여수로 분산 배치된 하멜 일행은 절도사에 따라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고초를 겪은 경우가 더 많았다. 뜨거운 햇볕에 온종일 서 있거나 하루 170m의 새끼를 꼬는 등 노역에 시달리던 하멜 일행 8명은 결국 배를 구해 1666년 조선을 탈출한다.
하멜 일행의 처지로 볼 때 조선에서의 생활은 공포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전체 64명의 선원 중 24명이 난파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조선 생활 13년간 21명이 더 죽었으니 훗날 조선을 떠올리기조차 싫었을 만도 했다.
그런데 왜 고향으로 돌아간 하멜은 기어이 조선생활을 기록으로 남겼을까. 훗날 표류기로 출간된 하멜의 기록은 사실 그가 일하던 연합동인도회사측에 조선에 억류된 동안 밀린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
이 책은 하멜의 제주도 표착 350주년을 기념해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항해와 표류의 역사’의 도록도 겸하고 있다. 전국의 박물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네덜란드 국립공문서보관소,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등 국내외 여러 기관에서 출품한 유물의 사진이 분류돼 수록됐다. 전시품이 아닌 ‘자료사진’도 풍부하다.
흔히 도록이라고 하면 그림이 주가 되고 그 내용 설명은 부실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경우와 다르다. 위에서 예를 든 하멜의 이야기처럼 표류의 역사에 관한 흥미진진한 일화와 진지한 탐구들로 가득 차 있다. 하멜의 표류를 포함해 한국에서 발생한, 혹은 한국과 관련된 표류의 사실(史實)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그에 따른 관련 유물의 사진들을 삽입했다. 기존 도록처럼 글이 그림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글을 따라가는 형식이다.
그간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주제라는 점도 관심거리지만 재미를 유지하면서 여느 인문서 못지않은 깊이를 유지한 글의 수준도 주목할 만하다. 설화와 전설에 나타난 표류, 역사에 기록된 표류, 난파선에서 건진 해저유물 등 표류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다. 책 말미에는 표류의 역사에 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학술논문 11편이 실려 있어 ‘심도 있는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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