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남자의 후반생(後半生)

  • 입력 2003년 8월 14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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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정기는 50대 이후라고 생각한다.” 2004학년도 1학기 대입 수시모집에서 3개 대학에 합격한 김종진씨(64)는 어제 본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A20면 보도). 그의 대입 합격증은 97년 정년퇴직 후 6년간 중고교 과정을 거치고 나서 얻어낸 ‘빛나는’ 성과다. 김씨는 퇴직 후 무언가를 이뤄 사회적인 평가를 받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들의 평가보다 개인적인 성취감이 훨씬 중요했을 터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으로 본 그의 얼굴은 청년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오정(45세 정년)’이니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남아 있으면 월급도둑)’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세태다. 40세에서 60세까지를 중년기로 본다면 중년 나이에 은퇴하는 일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다반사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은퇴 이후다. 오로지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에게 자기 삶의 후반기에 대한 계획이 있을 턱이 없다. ‘남자의 후반생’ ‘중년이 행복해지는 여섯 가지 비결’ ‘흔들리는 중년 두렵지 않다’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나이 드는 것의 미덕’ 등 서점가에 즐비한 중·노년 지침서가 오히려 한국 중년 남성의 실존적 위기를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남자는 30대 중반을 넘기면서부터 내분비 계통에서 남성 호르몬이 감소하고 여성 호르몬이 증가하는 현상이 시작된다. 중년 남성이 감성적으로 예민해지고 여성적인 특징이 두드러지는 건 그 때문이다. 중년이 되면 인생의 의미와 본질, 욕구에 대한 강렬한 자각이 일어난다는 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중년은 개별적 인간이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제2의 사춘기’라는 말이다. 정신분석가 카를 융은 중년을 활기와 감성과 열정이 있는 절정기라는 뜻에서 ‘인생의 정오(noon of life)’라고도 했다. 이처럼 ‘황금 같은’ 중년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시간을 허비하는 남자가 많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은퇴 이후의 삶은 남은 인생, 즉 여생(餘生)이 아니라 후반생(後半生)이라는 말이 있다. 인생의 주기로 보면 내리막길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 인생이 시작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후반생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하는 것은 어리석다. 김종진씨의 뒤늦은 도전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40세는 청년의 노년기이며 50세는 노년의 청춘기다”라고 했다. 말년이 행복하려면 ‘노년의 청춘기’를 잘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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