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영언/권력자와의 회견

  • 입력 2003년 5월 29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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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나 팔라치는 세계적인 권력자들과의 도전적인 인터뷰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여류 저술가다. 그녀는 인터뷰 도중 상대방에게 대들기도 하고 난폭한 행위를 유발하기도 한다.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과 마주앉았을 때였다. 싫어하는 질문을 던지자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당신 아버지께도 그렇게 할 거요?” 팔라치는 “물론이죠”라고 대답했다. 이어지는 문답. “아버지께 그렇게 한 적이 있소?” “예.” “그래, 아버지께서 당신 따귀를 때렸나요?” “지금 내 따귀를 때리고 싶은 거죠? 때리세요. 여기다 그대로 적을 테니까.” 덩샤오핑은 “허” 하고 웃고 말았다.

▷권력자와의 인터뷰는 장애요인이 많다. 사전에 질문 원고를 받아 보고 거북한 부분은 빼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고, 미리 이러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인터뷰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현장의 위압감 때문에 준비한 내용을 제대로 질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련한 인터뷰어는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한풀 한풀 옷을 벗기듯 놀라운 사실을 뽑아내고 권력자의 정치적 의도를 간파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년이면 몇 차례 대통령과 청와대 출입기자들간의 회견이 있지만 밋밋하기 일쑤다. 거의 사전 각본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미흡한 점에 대한 보충질문을 하기가 어렵고 독한 소리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엔 기자단이 회의를 통해 만든 질문 내용이 사전에 청와대 쪽으로 흘러간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땐 각본에 따라 하면서도 정작 방송은 한 시간 정도 늦게 내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라도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이 바람에 언젠가 야외회견을 할 때 방송화면에서는 날씨가 맑은데 실제로는 밖에 비가 내려 시청자들이 헷갈린 경우도 있었다.

▷그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땅 의혹’ 관련 기자회견을 두고 핵심을 비켜갔다는 지적이 많다. 기자들의 질문이 신통치 못해 제대로 추궁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기자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7명만 질문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대통령이 ‘더 질문이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지만 정해진 대로 하는 관행 때문에 아무나 일어서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고 한다. 문제가 되자 청와대가 다음달 있을 취임 100일 회견부터 ‘아무나 질문’ 형식으로 바꾸겠다니 기대가 된다. “권력자와 인터뷰를 할 때는 두둑한 배짱이 필요하다”는 팔라치의 말을 누가 실천하는지 보게 될 것 같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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