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한영우/민심 통합할 新탕평 정치를

  • 입력 2003년 5월 25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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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갈등은 언제나 있었다. 진보세력도 권력을 잡으면 기득권세력이 되고, 기득권이 없는 측에서 보면 기득권을 가진 측이 보수세력으로 규정된다. 보수와 진보는 이념의 차이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대체로 연령 차이에서 갈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없었던 시대는 없다. 문제는 보수와 진보가 어떤 역학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역사의 발전과 혼란이 갈라진다는 점이다.

▼개혁구호보다 비전 필요한 시대 ▼

보수세력이 극도로 부패해 민생이 파탄에 이르렀을 때는 진보세력이 혁명적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경제구조와 권력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왕조 교체였다. 혁명에 따르는 희생도 결코 작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보수세력의 탐욕과 사회모순이 극한에 이르지 않은 시기에 진보세력이 혁명을 일으키면, 이는 반역으로 간주되고 반역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조선 선조 때 정여립의 반란이나 고종 때 갑신정변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정여립이나 김옥균의 이상은 좋았지만 개혁방법이 지나치게 조급했다.

현명한 군주는 건전한 보수세력과 진보세력간의 견제와 협력을 유도해 국가의 중흥을 가져왔다. 이것이 율곡이 말한 ‘조제보합(調劑保合)’이요, 영조와 정조의 ‘탕평(蕩平)’이다. 집현전에서 키운 신진세력과 황희, 맹사성 같은 깨끗한 중신들을 보합시켜 문화의 황금시대를 연 세종이 그렇고, 훈신과 사림을 조화시켜 문물의 완성을 가져온 성종이 그렇다. 정조의 왕조 중흥도 규장각에서 키운 신진과 노론파 중신들의 탕평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보수세력도 차버리고 진보세력도 제거해 독재를 누리려다 실패한 임금이 연산군이다. 이에 반해 타락한 보수세력과 급진적 진보세력을 그냥 내버려두어 나라를 혼돈에 빠지게 한 것이 헌종, 철종 때의 세도정치다. 임금이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니 진보니, 개혁이니 코드니 하는 말들이 무성하다. 그 개념이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이심전심으로 그렇게 편이 갈라지고 있다. 서울 중심, 엘리트 중심, 기성세대 중심의 국가운영이 지방 중심, 비엘리트 중심, 신진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이는 명분과 이유가 있는 시대의 흐름으로써 이를 개혁과제로 보는 것에 이의를 달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회의 중심축이 바뀌는 것을 지나치게 불안한 눈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문제는 이른바 보수층, 혹은 기성세대를 옥석 구별 없이 일거에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 된다. 개혁이 혁명으로 변하면 그 개혁은 실패한다. 더욱이 ‘개혁’이라는 말도 이제는 신선미를 잃었다. 문민정부 이후 10년간 끊임없는 ‘개혁’ 속에서 살아왔다. 그 ‘개혁’이 많은 긍정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개혁주체가 부패로 연결되는 것을 보고 ‘개혁 피로증’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제는 개혁이라는 구호가 중요한 시대가 아니라 미래의 국가상을 그려내는 비전이 필요한 시대다. 경제안정과 국가안보는 너무나 당연한 일차적 과제이므로 이런 것이 핵심 비전으로 나타날 수는 없다. 물질적 목표가 비전으로 표방되면 이웃나라의 심기만 건드리고 실익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을 통합하는 비전이다. 지역의 민심, 계층의 민심, 세계의 민심을 사로잡는 비전. 그것이 바로 신탕평(新蕩平)의 문화적 비전이 아닌가. 이 비전이 세워지면 경제와 안보는 쉽게 따라온다.

▼‘코드’ 맞추다보면 지혜 좁아져 ▼

자고로 정치를 아무나 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민심 통합의 어려움 때문이다. 성공한 임금과 실패한 임금이 갈라지는 것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편을 가르고 코드를 맞출수록 지혜는 좁아지고 민심은 멀어진다. 그리고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가장 명심할 것은 ‘호리지실 차이천리(毫釐之失 差以千里)’라는 명구다. 처음에 털끝만큼 잘못하면 나중에는 천리만큼의 과오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뼈를 깎는 수양을 거친 선비들이 정치를 맡아야 한다고 옛사람들이 말한 것이 아닌가. 신탕평의 새 정치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한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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