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2월 27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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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田藏)의 무리가 보낸 사자와 함께 오광(吳廣)의 목이 이르자 진왕(陳王) 진승은 놀랍고도 슬펐다. 돌이켜 보면 오광은 오랜 벗이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큰일을 함께 이룬 동지이기도 했다. 특히 수졸(戍卒)들과 더불어 들고일어나 세운 <장초(장초)>로 보면 그는 누구보다 우뚝한 건국공신이었다.

그 때문에 진승은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자기를 대신해 왕 노릇을 할 수 있게 오광을 가왕(假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힘깨나 쓰는 장수와 날랜 군사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딸려주며, 몰려드는 유민들을 먹이는데 없어서는 안될 곡창지대인 형양(滎陽)을 치러 보냈다. 빼앗아야할 땅이 요긴한 만큼 빼앗은 공도 크리라 여겨 그리한 것인데, 이제 그 오광이 죽어 목만 돌아온 것이었다.

진승은 떨리는 손으로 사자가 바친 글을 읽어보았다. 먼저 오광을 죽인 다음 그 죄상을 알려온 것도 그렇지만, 알려온 오광의 죄상 또한 석연치 않은 데가 많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진승은 비정한 권력의 속성에 속속들이 길들여져 있었다. 아무리 전장과 그를 따르는 패거리의 죄가 뚜렷하다 해도, 하루가 멀다하고 불길한 파발이 달려오는 때에 대군을 이끌고 나가있는 장수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오광. 뒷날 내 반드시 그대의 한을 풀어주리라......)

진왕은 속으로 그렇게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전장(田藏)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사자를 형양성으로 보내 전장에게 초나라 영윤(令尹·재상)의 인수를 내리고, 더하여 그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올렸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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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을 대신해 모든 장졸을 맡게된 전장은 곧 자신이 우겨온 대로 군사를 움직였다. 먼저 이귀(李歸)에게 장수 몇과 군사 약간을 남겨주며 멀찌감치 형양성을 에워싸고만 있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날래고 굳센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기세 좋게 장함을 찾아 나섰다. 유리한 곳을 골라 지키며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공명심에 휘몰려 목숨을 재촉하러 나선 셈이었다.

전장이 군사들을 휘몰아 한나절이나 달린 끝에 장함이 이끄는 진나라 대군을 찾아낸 것은오창(敖倉) 부근이었다. 오창에는 진나라가 건조한 황토지대의 구릉을 이용해 큰 구덩이를 파고 곡식을 갈무리하던 일종의 지하 창고가 있었다. 창고는 이미 굶주린 유민들에게 털리고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부근의 다른 어떤 고을보다 곡식이 넉넉했다,

주문을 죽인 장함은 오광을 들이치기 전에 먼저 오창을 차지하고 함양에서 멀어질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한 군량부터 확보했다. 그리고 주문과의 싸움으로 지쳐있는 장졸들을 잠시 쉬게 하는 한편, 탐마(探馬)를 풀어 형양성의 형세를 알아보고 있는데, 전장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찾아 온 것이었다.

탐마(探馬)가 달려와 적병이 가까웠음을 알리자, 장함은 전처럼 훤히 트인 벌판에 진세(陣勢)를 벌이게 했다. 병졸들의 머릿수를 부풀리는 방식도 아니고, 장수의 재주를 자랑하는 것도 아닌 배치로서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실은 그들이 함곡관을 나오기 전 가장 공들여 익힌 진세였다.

처음 봉기했을 무렵에 누렸던 승세에 취해 적을 모르기는 전장도 죽은 주문에 못지 않았다. 거기다가 전장은 타고난 무골(武骨)의 단순함으로 공을 서둘기까지 했다. 장함이 따로 유인 계책을 쓸 필요도 없이, 그물처럼 펼쳐 놓은 진세(陣勢) 속으로 장졸들을 휘몰아 뛰어 들었다.

장함은 장수들을 풀어 전장의 퇴로를 끊게 한 뒤, 남은 전군을 들어 무서운 기세로 받아쳤다. 빽빽한 창칼의 숲 속에 갇힌 뒤에야 전장은 비로소 왜 주문 같이 헤아림 깊은 장수가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졌는지 알 듯했다.

“물러나라. 뒤로 몰리 물렀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한 뒤에 싸우자!”

전장은 소리높이 외치며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사방을 철통같이 둘러싼 진군(秦軍)들을 뚫고 나올 수는 없었다. 전장은 적에게 에워싸여 어지럽게 뒤엉킨 군사들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끝내는 누군지도 모를 병졸의 칼에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그 뒤 장함이 보여준 용병(用兵)의 신속함은 실로 눈부신 바 있었다. 들짐승 몰듯하여 전장의 군사들을 모조리 잡아죽인 장함은 쉴 틈도 없이 군사를 휘몰아 형양성으로 달려갔다. 길이 멀지않아 자정 무렵에는 전장의 부장(副將) 이귀가 진채를 얽은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그때 저희 상장군 전장의 기세만 하늘같이 믿고 있던 이귀는 가까운 장수들과 함께 태평스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과 말이 다가오는 기척이 있습니다. 횃불까지 켜들었는지 하늘 한 모퉁이가 훤합니다.”

“그게 어느 쪽이더냐?”

“동북쪽입니다.”

그러자 이귀는 혼자 다 아는 척 말했다.

“밤중에 행군하면서 군졸들에게 하무[枚]도 물리지 않고 횃불까지 켜들었다면 야습을 하려는 군사가 아니다. 거기다가 동북쪽에서 온다니 진군(秦軍)도 아니다.”

함께 술을 마시던 부하 장수 하나가 아무래도 걱정되는지 조심스레 권했다.

“그래도 장졸들에게 영을 내려 만일에 대비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무엇에 홀렸는지 이귀는 얼굴까지 실쭉해지며 핀잔주듯 말했다.

“소란 떨 거 없소. 상장군께서 이기고 돌아오시는 길이 아니면 진왕(陳王)께서 원병(援兵)을 보내신 것일 게요.”

그 사이 말발굽 소리는 군막 안에서도 들을 만큼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망보기를 나갔던 군졸이 숨이 턱에 찬 체 뛰어들며 말했다.

“어느 편인지 모를 기마대가 진채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적 같습니다.”

이어 더욱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적이다. 적의 야습이다!”

그제야 이귀도 술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나 혼란은 이미 걷잡을 수가 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적병 기마대가 진채 안을 무인지경 휩쓸 듯 베고 찌르며 내닫는 가운데 여기 저기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오래잖아 적군 보졸(步卒)들도 함성과 함께 밀려들었다.

거기다가 어떻게 연통이 되었는지 그 동안 굳게 지키기만 하던 형양 성안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갑자기 성벽 여기 저기 횃불이 오르더니, 뒤이어 적지 않은 인마가 함성과 함께 성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잖아도 얼마 되지 않던 이귀의 군사는 그와 같이 앞뒤로 적을 맞게되자 얼이 빠졌다. 한번 싸워볼 엄두도 내보지 못하고 달아나 제 한 목숨 건지기에도 급했다. 하지만 적이 워낙 대군인데다 앞뒤로 가로막고 들이치니 살아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날 밤 이귀를 비롯해서 형양 성밖에 남겨졌던 <장초(張楚)>의 장졸들은 아무도 에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몽땅 놀란 넋이 되고 말았다.

주문이 이끌고 함양으로 쳐들어간 군대와 오광이 이끌고 형양성을 공격하던 군대는 진왕(陳王) 진승의 군대 중에서 가장 굳세고 날랜 군사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몇 번의 싸움으로 그 두 갈래의 군대를 여지없이 쳐부순 장함은 다시 진현(陳縣)부근에서 봉기한 다른 농민군을 치기 시작했다. 관동(關東) 민란의 괴수로 지목된 진승의 근거지인 진현으로 밀고 들기 전에 등뒤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을 미리 쓸어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들 중에서 장함이 먼저 군사를 보내 치게 한 것은 등열(鄧說)이 이끄는 세력이었다. 등열은 진승과 같은 양성(陽城) 사람으로 담(담) 땅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수가 몇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진승 밑으로 들어가지 않고 따로 세력을 이루어 진나라에 맞서고 있었다.

장함은 왕리(王離)에게 군사 3만을 내주며 등열을 치게 했다. 등열은 겁내지 않고 맞서 싸웠으나 병기가 날카롭고 조련이 잘 된 데다 승세까지 탄 진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 싸움에 무참하게 져,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모두 잃고 제 한 몸만 겨우 빼내 진승이 도읍 삼고 있는 진현(陳縣)으로 달아났다.

그때 허(許)땅에는 질현(9縣) 사람 오봉(伍逢·史記에서는 伍徐)의 군사들이 머물고 있었다.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에 맞서 군사를 일으키자 그도 농민군을 모았는데, 그 세력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보기(步騎) 십만이라 큰소리 치며, 그 또한 진승 밑에 들지 않고 따로 한 갈래 세력을 이루었다.

장함은 왕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대군을 몰아 오봉을 쳤다. 오봉이 힘을 다해 버텨 보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하루도 안돼 군사들은 장함의 진군에게 조각 조각이 나 흩어져 버리고 오봉만 겨우 목숨을 건져 진승에게로 달아났다.

등열과 오봉을 쳐 없애자 진현 부근에는 진승이 직접 거느린 군사들 말고 달리 위협이 될만한 세력이 없어졌다. 이에 장함은 드디어 <장초(張楚)>의 도읍인 진현으로 밀고 들었다. 이세황제 2년 섣달 초순으로, 장함이 함곡관을 나온 지 한 달만이요, 진승과 오광이 군사를 일으킨 지 다섯달 만의 일이었다.

그해 7월 진승이 대택향(大澤鄕)에서 수졸(戍卒) 9백과 더불어 일어나 왕위에 오를 때까지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엄청난 기세를 돌이켜 보면, 그같이 급속한 반전(反轉)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어떤 이는 그걸 그저 하늘의 뜻[天命]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의 뜻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장함의 뛰어난 용병술과 그가 이끈 군사들의 우수함을 그 원인으로 내세운다.

틀림없이 장함은 여러 가지로 뛰어난 장수였다. 그러나 뒷날의 비루한 왕 노릇과 자살로 끝을 맺은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헤아려보면 그가 뛰어났다 해도 천하 대세를 바꾸어놓을 만큼은 아니었다. 장함이 거느린 군사들도 그랬다. 사면된 죄수와 노비의 자식으로 꾸며진 군대치고는 잘 싸웠지만, 오래잖아 그들 이십 만이 산 체로 한 구덩이에 묻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시대 흐름을 되돌릴 만큼 대단한 군사들은 아니었다.

따라서 장함이 그렇게 아무도 도와줄 이 없어 외롭게 된[孤立無援]이 된 진현으로 밀고 들게 것은 천하대세의 반전이라기보다는 진승의 영락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 급속한 영락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진승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력 내부에서 찾아보는 게 옳을 듯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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