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정찬주/“따분하긴요, 나무랑 새가 친군데”

  • 입력 2003년 1월 10일 19시 11분


전남 화순의 내 처소를 찾는 손님들은 나더러 무슨 낙으로 산중에서 혼자 사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손님들에게 내 식대로 하루를 조촐하게 보내는 오롯한 충만을 얘기해 줄 길이 없다. 사람이 입을 다물면 자연이 입을 연다는 금언이 있다. 그렇다. 나는 사람이 드문 산중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주변의 산중 가족들과 더욱 가까워졌다고 믿는다. 솔 향기 그윽한 오솔길로 나서면 낯익은 팽나무나 느티나무 감나무, 그리고 친근해진 물까치 어치 딱새 박새가 나를 반긴다.

그중에는 날마다 나와 눈인사를 나누는 텃새도 있고, 계절에 따라 들고나는 철새도 있다. 내가 반갑게 만나는 철새는 저잣거리에서 지조 없는 정치인을 손가락질할 때 말하는 그런 새와는 전혀 다르다. 내 처소 앞의 연못에 가끔 들러서 피라미를 낚아채던 철새 노랑할미새만 보아도 서식하는 자리와 오가는 때가 분명했다.

농사철에는 일손이 미숙해 산중생활의 여백은 그만큼 줄었다. 감자 눈을 따 이랑에 묻고난 후 날이 가물어 물을 뿌리던 일, 다람쥐가 땅콩을 파먹어 다시 늦게 파종했던 일, 더덕 줄기가 잘 뻗어나가게 대나무 버팀대를 세우던 일, 멧돼지가 오기 전에 고구마를 서둘러 캐던 일 등 초보 농사꾼은 요령 없이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지금 내 처소의 아랫방에는 밭에서 거둔 콩으로 쑨 메주가 여러 덩이 있다. 메주가 뜰 때는 냄새가 요란하더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일년 내내 식탁에 오를 된장국을 생각하니 흐뭇해진다. 콩을 털고 난 콩깍지나 콩줄기는 땔감으로 그만이다. 아침저녁으로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은 어미 개 보현이의 밥을 끓여주는데, 콩줄기는 화력이 어지간해 한 아름만 때도 개밥이 곧 데워진다. 보현이 덕분에 산후조리용 특식을 나눠먹게 된 문수는 몸무게가 부쩍 늘었고 하얀 털이 햇빛에 반짝거린다. 그래도 문수는 의리가 있어 보인다. 밤낮으로 보초를 더 잘 서는 것 같고, 콩밭으로 달려가서 거름이 되라고 똥을 싸주고 돌아오곤 한다. 공짜를 좋아하는 인간들과는 다르다.

한겨울인 요즘에는 산행을 자주 한다. 방금 전에도 산행을 나갔다가 아래 절에서 일하는 김 처사를 만났다. 그는 괭이를 어깨에 메고 한 손에는 죽은 물까치를 한 마리 들고 있었다. 죽은 물까치는 감나무 밑에서 발견했단다. 가지에 매달린 감을 먹고 싶어한 물까치가 직박구리 떼에게 공격을 받은 듯싶었다. 물까치는 자신의 큰 덩치만 믿고 방심했다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틴 작은 직박구리들에게 당한 것 같다.

선가(禪家)에 사중득활(死中得活)이란 말이 있다. 해인사 방장스님이 정진하는 퇴설당 방에서 마주친 구절이다. 무슨 일에 임하든 목숨을 내어놓은 것처럼 발심(發心)의 의지가 투철하고 절실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산은 한겨울에도 꽃을 보여준다.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복수초(福壽草)가 그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눈 속에서 핀다고 해 설연화(雪蓮花)라고도 하고 얼음새꽃이라고도 부른다. 아래 절 양달에서 동백꽃이 만개하는 한겨울부터 한두 송이씩 피어나는, 노란 국화처럼 생긴 꽃이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한겨울의 산중에서 동백꽃 아니면 차꽃 말고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등산객이 노란 조화를 떨어뜨리고 갔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음새꽃은 따뜻한 숨을 내쉬는지 꽃 부근만 흰눈이 녹아 있었다. 맨 처음 얼음새꽃을 발견한 사람은 아래 절 공양주 보살이었다. 보살이 산나물을 캐러 갔다가 발견해 나에게 꽃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누구에게도 꽃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고 혼자 찾아가 보고 돌아오곤 했다. 소문이 난다면 소유욕에 취한 인간들 손에 얼음새꽃들은 머잖아 자취를 감추고 말 테니까.

산길을 내려와 내 처소로 들어오는 골짜기 개울가에는 대숲이 있다. 개울물은 영산강의 여러 시원(始原) 가운데 하나이고, 내 산중 처소 옆을 지나 흘러간다. 대숲 속에는 차나무가 자생하는데 아직까지도 나는 찻잎을 따다가 덖어 보지는 못했다. 대숲 속에서 자란 차나무의 잎을 따 덖은 차를 죽로차(竹露茶)라 부르고 차 중에서 최상품으로 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내 혀를 즐겁게 하고자 대숲 속에서 자생하는 찻잎을 딸 생각은 없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흐르고 흘러 마침내 영산강이 되고야 마는 이 골짜기의 맑은 물이나 한 모금 마시며 책 읽고 농사나 익힐 따름이다.

▼정찬주 작가는▼

산골의 암자나 선방을 찾아다니며 보고 깨달은 바를 글로 써왔다. 성철 스님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민음사), 혜초의 길을 따라 간 실크로드 견문록 ‘돈황 가는 길’(김영사)과 몇 권의 암자기행문을 냈다. 최근에는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김영사)를 펴냈다. 현재 전남 화순군의 산중에 집을 짓고 순한 개 보현이 문수와 살면서 농사를 익히고 있다.

정찬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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