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영/새정부 '분배정책'의 조건

  • 입력 2002년 12월 22일 18시 50분


1970년대 한국과 영국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제모델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했다. 해마다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이며 빠른 속도로 저개발국가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압축성장은 중앙정부가 자원을 관리하고 배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한국식 경제모델에서 성장에 장애가 되는 요소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부(富)의 분배나 복지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이런 요구는 정치적으로 탄압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저항도 멈추지 않아 70년 11월 전태일 분신자살 이후 70년대를 관통하는 사회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침체하고 노쇠한 경제를 갖고 있었다. 이익단체들의 끊임없는 파업과 무능한 정부가 합작해낸 ‘영국병’이 만연했다. 밀턴 프리드먼의 지적대로 이 병은 무리한 복지국가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경제는 유럽 안에서도 독일과 프랑스에 뒤떨어지는 2류로 추락했다.

한국은 고도성장을, 영국은 복지국가를 추구했지만 두 모델 모두 적지 않은 후유증을 수반했다. 한국은 억눌렸던 사회적 요구가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용암처럼 분출하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었고 영국 역시 마거릿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수술하면서 ‘사회통합’이라는 가치가 깨지는 아픔을 겪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20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시장경제이고 어디까지가 정부의 역할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많은 견해가 있다.

노 당선자의 공약과 발언을 살펴보면 빈부격차 해소와 복지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과거 한국이 외면한 사회통합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국의 교훈에서 보듯이 복지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경제 자체가 쇠퇴할 수 있다. 나눠줄 부를 축적하지 못하면 분배 정책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 대통령 당선으로 경제운용의 틀이 바뀐다 해도 그 한계는 국가경쟁력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함께 먹어야 할 밥상을 깨뜨리면서까지 이익단체들의 요구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이 변화는 미래세대인 20, 30대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가역성(不可逆性)을 띠고 있다. 한국사회는 이제 하나의 다리를 건넌 셈이다.

이런 전환기에는 사회적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각계의 요구가 도를 넘을 수도 있다. 어떤 그릇이라도 이런 요구를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따라서 조정 능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겠지만 때로는 과감히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욕을 먹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물질적 기반의 변화는 때때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회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세계 최고의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과 인터넷 사용률이라는 물질적 기반이 이번 선거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요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되새겨봐야 한다.

복지국가라는 꿈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지나치면 나라의 경쟁력이 떨어져 전체가 가난해지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사회통합을 위해 분배 문제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지만 나눠줄 돈을 버는 일이야말로 모든 것의 전제조건이다.

김상영 경제부 차장 young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