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전우익/˝새들의 잔치마당, 엄나무 아는겨˝

  • 입력 2002년 11월 29일 18시 18분


10년 넘게 느티나무만 심다 1994년부터 여러가지 나무들을 심기 시작했지요. 그 무렵 임경빈 선생님이 쓴 나무백과(百科)를 읽고 엄나무를 심고 싶었는데 종묘상에도 없데요. 왜 엄나무를 심고 싶었냐면 새들이 잔치를 벌이는 나무라 해서입니다. 어릴 때 문설주 뒤에 엄나무 걸어놓은 걸 보긴 했지만 살아 있는 나무는 못 봤는데,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동리 한쪽 모퉁이 저의 집 둘레에 심어보고 싶었어요.

▼열매먹고 새똥으로 씨뿌려 ´보답´▼

엄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아름드리로 자라는 키큰 나무로 검은 껍질이 변해 돋아난 가시는 나무가 굵으면서 없어진대요. 여름에 피는 꽃은 암수가 같은 나무에 피는데, 우산모양처럼 주저리를 이루는 누런 빛깔의 작은 꽃들이 많이 핀답니다. 몇 살 먹어야 피는지 궁금한데 그 말은 어느 책에도 없네요.

꽃엔 꿀이 많다니 벌떼가 끊이지 않겠지요. 콩알만한 열매는 가을에 검게 익는데, 이게 바로 새들이 벌이는 잔치판이래요. 그런데요, 느티나무 참나무 수유나무는 씨가 그 나무 밑에 떨어져 싹터 자라는데, 엄나무 밑에는 싹터 자라는 모종이 없어요. 엄나무 씨는 새의 창자를 거쳐야 싹튼대요. 엄나무 열매를 먹은 새의 똥이 떨어진 땅에 싹터 자란답니다. 재미있지요. 새는 열매 먹어 좋고, 나무는 씨 뿌려주니 좋고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런 게 진짜 잔치지요.

96년 이른봄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동쪽으로 한 5리 떨어진 골짜기에서 한 그루, 서쪽 산골짜기에서 한 키 넘는 것 한 그루, 이렇게 두 그루 캐어 와 심었어요. 다음해엔 앞산에서 한 그루, 그 다음해엔 서울 종로5가 종묘상에서 삽목한 것 열 포기를 사다 심었어요. 동쪽 산골짜기엔 꽤 큰 엄나무 한 그루가, 서쪽 산골엔 두세 길 됨직한 엄나무가 있어요. 서쪽 엄나무는 아마 동쪽 엄나무 열맬 따먹은 새가 서쪽 산골까지 가서 눈 똥에서 싹터 자란 것 같아요.

지금 저의 집 담 안팎에는 아홉 그루의 크고 작은 엄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올핸 봄부터 비가 잦아 작은 나무는 넉 자 120㎝까지 자랐습니다. 작은 나무는 작은 대로, 길 반쯤 되는 나무는 그런 대로 좋습니다. 마치 우기청호(雨奇晴好). 비 와도 좋고 맑아도 좋듯, 바람직한 숲은 큰 나무 중간나무 어린 나무가 알맞게 두루두루 함께 자라는 숲이랍니다. 노장청(老壯靑)은 숲과 함께 사람의 팀워크에도 가장 좋은 건가 보죠.

이 나무들이 자라 꽃 피고 열매 달려 산새들이 몰려와 열매를 실컷 따먹고 창공을 가르며 이리저리 날며 누는 똥이 땅에 떨어져, 이 골짝 저 골짝에 엄나무가 자라 산천은 푸르름과 아름다움을 더하겠지요. 산새들은 이 나무 저 나무 열매를 따먹고 씨뿌리는 일을 합니다. 뿌린다는 걸 전혀 모르고 뿌립니다. 알고 뿌리는 것보다 차원 높은 경지에서 이룬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지요.

안마루와 사랑부엌 사이 고방 문설주 위에 아홉 자 가까운 말라죽은 엄나무 줄기가 걸려 있습니다. 96년 봄 창팔마을에서 캐어 와 심은 가장 큰 엄나무 줄기입니다. 심던 해부터 세력이 얼마나 좋던지 하늘을 바라보며 치솟는 힘이 저한테까지 전해지는 듯했어요. 나무의 기운이 사람한테 전해지는 건 확실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3년 동안 신나게 솟아오르더니 99년 늦봄 이파리가 후드득 떨어지더니 사흘 만에 다 떨어집디다. 그래도 다시 살아날까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봤더니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와도 깜깜소식이었습니다.

뿌리째 뽑아 재보니 18자나 나가요. 맺은 인연을 차마 버릴 수도, 땔 수도 없어 거기 그렇게 달았습니다. 살아서는 우뚝 솟아 뿌듯한 힘 안겨주더니 죽어서는 안뜰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게 하는 것 같아요. 지리산 장터목 고사목 지대가 비장미를 안겨 주듯이요.

▼생명 키워내는 자연은 보물창고▼

옛날부터 나무에 접붙이고 꺾꽂이하고 휘묻이는 많이 했지만, 나무와 나무 줄기를 서로 붙여 한 나무로 만드는 연리목(連理木)은 처음 만들어봤어요. 우선 4, 5년 자란 엄나무 두 그루를 한 발짝 정도 떨어지게 심어요. 그 후 뿌리내린 두 나무가 맞닿을 줄기 쪽 껍질을 긁어낸 뒤 맞붙여 단단히 땅 속에 묻어 몇 년 두면 두 나무가 한 나무로 핀답니다. 이런 나무가 생기면 한 집안의 화평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동네가 평화로워진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나무의 힘이 그만큼 크니까요.

다음에는 산수유와 뽕나무가 새들을 위해 작고 아담한 잔치상을 차린 이야기를 할게요.

▽전우익은 누구?▽

1925년생.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마을에서 자연을 스승삼아 살아가는 농사꾼 수필가. 자연 속 삶의 얘기들을 모아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3년),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95년), ‘사람이 뭔데’(2002년) 등을 펴냈다.

전우익 농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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