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칼럼]여론의 '일교차'

  • 입력 2002년 11월 25일 18시 21분


대통령 후보들에게 여론조사 결과는 피를 말리는 성적표와 같다. 지지율은 간혹 정치인들을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게도 하고 한없는 좌절에 빠지게도 한다. 그러나 여론이란 것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지는 우리가 역대 선거 때마다 예외 없이 경험해 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난번 대선이 치러진 97년 5월,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박찬종 당시 한나라당 고문은 김대중, 이회창 어느 후보와 견주어도 51%가 넘는 득표로 당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 입성을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지만 불과 한 달 뒤 “정치 무상, 마음을 비웠다”며 고개를 떨구고 물러나야 할 정도로 유권자들은 그에게서 순식간에 시선을 거둬갔다. 여론의 ‘일교차’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 사례다.

▼가위 바위 보로 후보 뽑나 ▼

멀리 갈 것도 없다. 올 들어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만 봐도 그렇다. 민주당 경선 직후 지지율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던 노무현 후보는 두 달 후 ‘맨땅에 헤딩하기’ 직전까지 추락했고 이어서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세상을 경악시키더니 얼마 뒤에는 이회창 대세론이 굳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지지율들은 모두 가물가물,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전 후보(?)가 바로 이렇게 덧없는 여론조사에 운명을 맡겨 한 판 승부를 겨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코미디’라며 권위 있는 여론조사 기관들이 손사래치고 일을 거부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오차범위도 인정하지 않는 여론조사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승자를 선택하는 것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시골마을 이장 선거에서도 후보들은 정견을 내놓고 심판 받는데 명색이 일국의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이 인기가요 선정하듯 여론조사로 후보를 택했다는 것이 영 개운치 않다. 이런 식으로 서태지나 홍명보를 노, 정 두 후보와 한번 붙여 보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단일화라는 것도 그렇다. 단일화가 안 되는 것은 ‘쌈박질’이나 하는 것이고, (심지어 출신배경, 이념과 노선이 상극인 사람끼리라도) 단일화를 하는 것은 점잖고 선한 것인가. 경쟁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제도다. 최선을 다해 자기 향상의 노력을 벌인 경쟁의 결과는 승패에 관계없이 값지고 알찬 법이다.

경쟁이 그렇게 나쁜 일이고 기피해야 할 일이라면 이번 대선에서 거론되고 있는 모든 후보들이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 후보를 만들어 유권자 앞에 턱 내놓으면서 ‘자, 우리 정치인들은 이렇게 사이좋게 대선 후보를 하나로 통일했으니 유권자 여러분은 그렇게들 알아두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 국민은 지금 정치쇼에 현혹돼 이런 식으로 선택권이 박탈당하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일화 경쟁과정에서 두 후보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희생되어도 좋다, 이회창 후보를 이기기 위해 단일화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지겠다면 몰라도 누구를 막기 위해 정치적 생명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과연 대통령 후보다운 생각인가. 흡사 내가 미워하는 운전기사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그 사람이 모는 차에 치여 죽어버리겠다는 식 이다.

일부 정파와 그 언저리의 이상한 집단들은 ‘여론조사 결과 60% 이상이 단일화를 지지하기 때문에 그걸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이런 여론조사를 한 번 해보면 어떨까. ‘당신은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것이 좋은가, 많이 물리는 것이 좋은가.’ 모든 일을 여론조사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론의 선택은 늘 옳은가 ▼

이렇게 해서 선출된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고 가정해 보자. 그 정부는 모든 정책을 여론에 영합해 선택하고 결정할 것인가. 위정자들의 실정을 비판하는 국민 여론에까지 정부가 맞서라는 얘기가 아니다. 지도자는 종종 여론에 반하고 욕을 먹더라도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유익하다면 입에 쓰고 고통스러운 정책을 선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여론의 실수는 수도 없이 많았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치는 비뚤어진 여론에 밀려 예수가 처형당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여론의 선택은 늘 옳은 것인가. 여론조사로 대통령 후보를 정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규민 논설위원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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