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정치 검찰'의 말로

  • 입력 2002년 11월 10일 19시 15분


현 정부 출범 직후인 98년 과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PK(부산-경남)지역의 기업인들이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 “정치권에 돈 댄 일을 대라”며 문초를 당했다. YS의 한 측근은 “YS가 DJ를 ‘독재자’라고 비난한 배경에는 검찰에 불려가 혹독하게 당한 가까운 기업인들이 찾아와 읍소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과거 ‘호남 조폭(組暴)’계의 거물로 유명했던 한 인사의 얘기는 더욱 시사적이다. 그는 현정부 출범 후 “YS 때는 아무 잘못이 없어도 수시로 검찰이 부르고, 잡혀 들어온 다른 조폭들에게 나와 관련된 건을 ‘무조건 불라’고 다그쳐 정말 혼났다”며 “이제야 숨 좀 쉬고 살 것 같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정치풍향에 민감한 검찰의 생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98년 취임 초 검찰간부들을 청와대로 불러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강조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적절한 지적이었다. DJ는 5일 국무회의에서 ‘서울지검 피의자 폭행 사망사건’에 대해 검찰을 질타하면서 취임 초의 이 발언을 거듭 상기시켰다.

그러나 정작 김 대통령의 이 같은 당부와 달리, 현 정권 들어 검찰은 최악의 곤욕을 치렀다. 검찰사상 최대의 항명사태인 ‘검란(檢亂)’을 비롯해 ‘옷 로비사건’ ‘파업 유도발언’ ‘충성메모 파문’ ‘이용호 게이트’ ‘홍(弘)3 게이트’ 등 검찰이 연루된 사건만 헤아리기에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현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소수정권을 이끄는 DJ로서는 통치도구의 핵심인 검찰을 장악하려 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이 과정에서 검찰이 ‘정쟁(政爭)’의 한복판에 섬으로써 지나치게 정치화된 결과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검찰인맥을 장악하기 위한 현 정권측의 노력은 어느 정권보다 집요했던 게 사실이다. 97년 대선 당시 ‘DJ비자금수사 유보결정’을 내린 김태정(金泰政) 검찰총장을 DJ가 정권교체 후에도 유임시키고 각종 스캔들에 연루됐을 때도 ‘바른 법조인’이라며 끝까지 감쌌던 것이 상징적인 예다.

이러다 보니 현 정부 출범 후 ‘총풍’ ‘세풍(稅風)’ ‘병풍(兵風)’ 등 각종 정치관련 사건 수사가 벌어질 때마다 검찰의 공정성이 여야공방의 핵심쟁점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 셈이다.

문제는 최근 정치권의 움직임에 비추어 똑같은 상황이 리메이크한 드라마처럼 되풀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는 점이다.

벌써부터 검찰 일각에서 현 정권아래 물먹은 특정지역이나 특정고 출신 검찰간부들이 “두고보자”며 벼르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피의자 폭행 사망 사건’과 관련해서도 검찰 안팎에서는 “담당검사의 개인적 의욕과잉 때문에 빚어진 일이지만, 그동안 ‘조폭’을 방치하다시피 하던 검찰 분위기가 강경대처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한나라당에서 나오는 ‘정치보복을 않겠다’는 약속에 대해서도 “‘알아서 물어뜯는’ 일이 없도록 검찰을 바로 세우지 않고는 구두선(口頭禪)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반응이 적지 않다.

검찰이 정치바람에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인권존중’이든, ‘정의구현’이든, ‘정치보복 금지’이든 어떤 구호도 연목구어(緣木求魚)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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