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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18일 17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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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짚가리’.
도시적 생활양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그 용어조차 낯설다. 호기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가을 추수 후 논바닥에 쌓아놓은 그저 흔한 볏짚더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지역마다 모양이 다르고, 여러 기능을 수행하며, 전통 농경사회의 다양한 의미와 상징이 응축된’, 다시 말해서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텍스트라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촌스럽지만 소박한, 우리 풍토와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짚가리 문화경관을 ‘도시출신 농부’ 이자 지리학자인 저자는 풍부한 답사를 통하여 그려냈다.
생각해 보라. 한 연구대상을 염두에 두고 20여년이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을. 더군다나 그 연구대상은 역사자료로 기록될 가능성도 적은 전통사회 서민들의 일상 생활경관인 ‘짚가리’이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의 200여 지역의 500여개 마을, 그리고 유럽문화권과 중국, 일본까지도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답사했다. 연구실에 앉아 문서 자료를 주무르는 ‘안락의자형 학자’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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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들은 공간과 장소 위에 뚜렷한 형태를 지니고 펼쳐져 있는 문화경관에 주목한다. 구체적인 물적 증거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특징을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 지리학의 연구물들은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그러한 성향이 읽힌다. 논리적 비약이나 지적 유희를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부분적으로 다소 건조해 보일 수도 있으나, 철저한 관찰과 객관적인 분석을 통한 성과이기에 이 책은 한국 전통문화경관 연구의 기초자료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지리학자는 경관의 지역적 분포패턴에 주목한다. 이 책에서도 짚가리 경관이 지역적으로 어떻게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어떤 경로로 확산되었는가를 지도화하여 분석하고 있다. 각 지역의 짚가리 경관을 주로 전파론적인 입장에서 조망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긴 하나, 국지적인 지역 환경에의 적응 기제를 아울러 다루기에 구체적이고도 종합적이다.
나는 이 책을 ‘그려냈다’고 표현하고 싶다. 연구대상을 있는 그대로 군더더기 하나 없이 분석하고 해석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책 속에는 다양한 짚가리들을 부드러운 터치로 스케치해낸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말없이 서있는 문화경관을 따스한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들과 깊이있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 속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준다는 점이다.
인간들의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과 재구성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화경관은 인간들의 삶에 편리한 기능성을 제공한다. 또한 인간들은 그것들과 공생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미와 상징을 부여한다. 문화경관은 눈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표면적인 형태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속에 당대의 뛰어난 기능적 효율성을 담고 있고, 다중적인 의미를 함축하여 정교하게 상징화된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문화경관의 연구는 그것을 이해하고 독해하는 작업,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기술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책은 고집스런 한 지리학자의, 사라져 가는 농촌문화경관에 대한 소박한 아름다움과 논리적 정교함을 그려낸 그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영민 이화여대 교수·사회생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