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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14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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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원년은 ‘체육관선거’ 원년이기도 했다. 그해 박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 중 2357명(99.9%)의 지지를 받아 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체육관선거가 종료된 것은 그로부터 15년 뒤인 1987년이었다. 그리고 다시 15년이 지나 유신의 양지와 음지에서 성장한 3김 시대마저 그 끝을 보이고 있다. 유신의 잔영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15년 세월이 두 번 필요했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풍년사업’이라 명명된 유신공작은 72년 5월경부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주도 하에 이뤄졌다.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비슷한 시기에 국가주석제를 신설해 1인체제를 공고히 했다. 남북공동성명이 남북한 통치자의 영구집권 기반구축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 셈이었다. 당시 ‘김일성이 서울에서 환갑잔치를 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남북관계엔 유례 없이 해빙무드가 조성됐으나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았다. 지금 남북관계엔 그때 이상으로 ‘햇볕’이 내리쬐고 있지만 남북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남북관계는 또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유신을 하면서 정부는 100억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 마이카시대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홍보물엔 어김없이 ‘행복한 모습’이 그득했다. 반면 중고교생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새로 이해하느라 땀을 흘렸고, ‘총통제 시도’ 발언으로 유신을 예고했던 유기천 전 서울대총장은 망명길에 올랐다. 작가 최인호의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과 포크송이 폭발적 인기를 얻던 시절이었다. 유신은 그렇게 왔다 갔지만, 40대 중후반과 50대 초반에게 유신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어정쩡한 세대인 이들의 암울했던 젊은 시절이 유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임채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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