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월드컵]길거리 응원 '붉은악마' 좌담

  • 입력 2002년 6월 28일 15시 28분


왼쪽부터 신동민 정주영 이동연 이정민씨 - 박경모기자
왼쪽부터 신동민 정주영 이동연 이정민씨 - 박경모기자
《세계를 놀라게 한 ‘6월의 전설’ 한복판에는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한국의젊은이들이있었다.700만명의 인파가 모인 곳에서 손쉽게 친구와 연인,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최고수준의 휴대전화 보급률 때문이었다. W세대(World Cup Generation) 또는 D세대(Digital Generation)로 불리는 이들은 아마도 우리 역사상 기성세대의 찬사를 받은 최초의 세대일 것이며, ‘자랑스러운 조국-대한민국’이란 정서적 연대를 경험한 최초의 세대일 것이다. 이동연 문화연대 사무차장(36), 신동민 ‘붉은 악마’ 미디어팀장(30), 이정민 코리아 에셋 어드바이저스 리스&마케팅팀 애널리스트(24·여), 월드컵 미디어센터 자원봉사자인 정주영씨(23·여·이화여대 특수교육과 4년)가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나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느끼고 체험한 2002 월드컵의 감회와 ‘월드컵 이후’의 바람 등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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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정민〓여덟 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2년 전 한국에 다시 온 저는 전에는 축구 중계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6월에 무언가에 끌려 빨간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를 주문했어요. 광장에서 애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정주영〓이전에 제가 한심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가 축구 중계를 보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월드컵 축구의 90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줄이야….

▽신동민〓‘붉은 악마’ 측에서는 길거리응원에 간부급 회원을 단 한차례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방송사와 몇몇 대기업이 행사를 지원했다지만, ‘붉은 악마’가 길거리응원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동연〓젊은 세대의 열광은 자발적이고 자생적이었습니다. 지난달 출산한 아내마저 축구를 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젊은이들이 평생 외칠 ‘대한민국’을 이번에 모두 불렀다고 합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젊은이들의 애국심이 높아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4강 신화가 곧장 애국심으로 연결되는 것은 과한 것 같지만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하는 것 말이죠. 태극기 문양의 상품이 불티나게 팔린 것도 태극기나 우리 국호가 하나의 ‘패션’으로 통했다는 것 아닐까요.

▽이동〓일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쇼비니즘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브레이크 없는 ‘대한민국’ 열풍을 누가 배후조종하거나 드라이브를 걸지 않았다는 겁니다. 일본도 16강에 진출하자 도쿄에서 1000여명이 강물로 다이빙하는 등 열광했지만, 무대를 우리만큼 길거리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최근 일본의 스타 플레이어인 나카타 히데요시가 경기 전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따라 부르지 않아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왜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일본 언론들이 묻자 나카타는 “별로 재미없다”고 말했었죠. 일본도 ‘닛폰’을 외치며 열광했지만 대부분 ‘90분의 내셔널리즘’으로 끝났습니다.

▽신〓1995년 당시 ‘붉은 악마’의 결성 취지는 “축구 보면서 재미있게 놀자”였습니다. ‘붉은 악마’ 이전에는 치어리더를 중심으로 ‘남행열차’를 부르면 술취한 중년 아저씨들이 웃통 벗어제치고 그랬었죠. 우리는 좀더 세련되고 멋있게 놀아보자는 취지로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 등을 만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좋아했고 대표팀 선전이 여기에 얹어져 대한민국을 그렇게 외쳤던 것 아닐까요. 국호로서 연호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응원구호 자체로 외친 사람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개인주의적이고 분절됐다라는 디지털 세대들이 광장으로 모인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동〓인터넷 상의 디지털 커뮤니티에 익숙한 이들이 오프라인 상에서 다시 거대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겠죠.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온라인 환경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러한 자발적인 광장은 더없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관건은 ‘자율’이었습니다. 만약 월드컵 조직위측이 “부디 광화문으로 나와 응원 대열에 합류해주시기 바랍니다”며 청탁성 동원을 했다면 이들은 길거리에 없었을 겁니다.

▽신〓오프라인 상의 거대 공간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또 디지털 세대들에게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은 별다른 구분이 없습니다. 붉은 악마 회원들에게 물어보면 이번 월드컵은 “앞으로 다시 보기 힘든 마당이고 축제였다”고 합니다. 또 많은 젊은이들은 월드컵이 뒤덮고 있는 디지털 공간에서 낙오되기 싫었을 겁니다. 길거리응원은 점점 선택이 아니라 ‘한번은 나가 봐야하는’ 자리가 됐던 것이죠.

▽정〓요즘 친구들 휴대전화는 온통 월드컵이에요. 벨소리가 ‘오∼필승 코리아’로 바뀐 것은 물론이고 휴대전화 그림은 온통 월드컵과 관련된 것인걸요.

▽이정〓제 외국인 친구들은 젊은이들의 질서에 ‘경악’하는 눈치예요. 게다가 어떻게 청소까지 할 수 있느냐며 놀랐어요. 이탈리아전이 끝나고 차를 몰고 광화문을 빠져나가는데 ‘대∼한민국’ 구호의 박수 5번에 맞춰 경적을 눌렀더니 남자 몇 명이 길을 터주더군요. 디지털 세대라는 표현이 생긴 이후 이들이 국가적인 행사에 한데 뭉친 것은 처음인데, 어느 세대보다 세련되고 세계화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번에 온통 붉은 색 티셔츠로 ‘붉은 바다’를 이루는 것을 보고 한국 현대사에서 붉은 색이 갖는 이데올로기적인 강박감도 벗어버렸다고 합니다.

▽정〓그냥 예뻐서 입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관성적으로 입었던 것 아닌가요.

▽이정〓20대는 ‘붉은 색’에 대한 정치적 거부감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붉은 색은 그저 강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붉은 색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거의 없는데 기성 세대들이 “아, 얘네들은 우리하고 다르구나”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 같아요.

▽신〓젊은 세대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성 세대와 완전히 ‘절연’되어 있다는 것을 이번만큼 명쾌하게 보여준 적도 없었습니다. 이와 함께 ‘붉은 악마’의 악마가 갖는 종교적 의미를 애써 찾으려는 어른들도 있더군요. 젊은 세대의 에너지에 대한 기성 세대의 ‘부러움’이 역설적으로 표현된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젊은 여성들의 열광은 이례적이었습니다. 꽃미남 스타는 할리우드 스타 이상이었습니다.

▽정〓이번 월드컵은 저에게 스포츠라기 보다 이벤트였는데 대표팀이 선전하면서 점점 잘 생긴 선수들이 눈에 들어오고…. 안정환이 실수하면 “아,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하고, ‘덜 잘 생긴’ 선수가 실수하면 “왜 진작에 저 사람을 빼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정〓캐나다에서 축구를 전혀 몰랐을 때도 잉글랜드의 데이비드 베컴의 이름은 알고 있었어요. 여성 특유의 취향 문제인 것 같아요.

▽이동〓부산에서 열린 파라과이-남아공 조별 예선은 관중석이 많이 비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여고생들이 “꺅!”하면서 열광하던데, 알고 보니 파라과이의 간판 꽃미남인 로케 산타크루스 선수가 전광판에 잡히더라고요.

-정부는 이번 월드컵을 “국운 융성의 계기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이정〓얼마 전 캐나다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TV 보니까 너희 나라 정말 굉장하더라”고 하더군요.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는 제가 볼 때 국가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이동〓너무 거창한 게 아닌가 싶어요. 목표가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단지 대통령이 관계 장관에게 지시만 내렸다고 해법이 나오겠습니까. 저는 우선 광화문 일대를 문화공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냄비라는 지적을 피하고 월드컵 이후를 오랫동안 기억하려면 ‘상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신〓‘4강 신화’가 만병통치약일 리 없습니다. 우선 국내 프로축구 리그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자신이 진정한 ‘붉은 악마’라고 생각하면 7월부터 열리는 프로축구 리그를 보시면 됩니다. 그곳에는 항상 ‘작은 광장’이 열립니다.

사회·정리〓나성엽기자 cpu@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좌담 참석자▼

-이동연

△중앙대 영문학 박사

△문화과학 편집위원

△현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 사무차장

-신동민

△'붉은 악마' 미디어팀장

△현 심마니 라이프팀 기자

-이정민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경영학과 졸업

△코리아 에셋 어드바이서스(KAA) 리스&마케팅팀 애널리스트

-정주영

△이화여대 특수교육과 4년

△월드컵 미디어센터 자원봉사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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