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노무현 프로그램´ 의 1순위

  • 입력 2002년 6월 21일 18시 49분


2000년 4·13 총선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 서울 인사동의 한 밥집에서 만난 노무현(盧武鉉)씨는 진한 청색의 잠바차림이었다. 부산에서 다시 낙선한 그는 지쳐있었고 이마를 가로지른 굵은 주름살은 그를 중년의 노동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 무렵 그를 좋아하는 네티즌들은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렀다. 뻔히 떨어질 줄 알면서도 민주당 간판을 달고 부산에서 나서기를 고집하니 ‘바보’가 아니냐는 거였다. 물론 그 ‘바보’에는 지역감정에 저항하는 노무현에 대한 애정이 녹아있었고 필자 또한 그런 그의 패배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화근 덩어리 남은 민주당▼

동동주를 마시며 우리는 거대한 벽 같은 지역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3김시대가 간다고 지역감정이 곧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역감정을 추슬러 나가려면 분열의 리더십이 아닌 통합의 리더십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했다. 그가 그때 통합의 리더십을 보일 적임자는 바로 ‘노무현’이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설령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더라도 필자가 귀담아들었을지 의문이다. 당시 그는 총선에서 떨어진 원외 정치인에 불과했고 영남출신인 그가 현 정권에서 설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미심쩍었다.

그랬던 그가 2년이 지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됐다. 광주에서 불기 시작한 ‘노풍(盧風)’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작년 가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면 석 달 안에 뜰 수 있다고 했다. 필자는 그때도 긴가민가했다. 오히려 필자는 너무 짧은 시간에 뜨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거라고 말했다. 그의 ‘튀는 발언이 주는 불안정성’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를 다소 머쓱하게 한 듯도 싶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말대로 단숨에 떴고 필자는 그가 2년 전 인사동 밥집에서 말한 통합의 리더십을 떠올렸다.

그런데 두 달이 조금 지나면서 ‘노풍’의 기세가 급속도로 수그러들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와의 지지율 추이도 큰 폭으로 역전됐다. 가까스로 재신임 파문은 봉합됐으나 8·8 재·보선에서도 6·13 지방선거에서처럼 참패하는 날이면 노 후보가 스스로 제의했던 민주당 대통령후보 재경선이 현실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로서는 실로 배수(背水)의 진(陣)을 친 격이다.

지방선거에서 졌다고 국민경선으로 뽑은 대통령후보를 대번에 갈아치우자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민주당 쇄신파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선거 참패에 어느 한 사람 책임지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모양새는 볼썽사납다. 한화갑(韓和甲) 대표로서는 억울하다고 하겠으나 적어도 당 대표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야 했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 보니 재신임 결정 하루 만에 다른 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화근(禍根)덩어리다.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한 첫째 원인은 대통령 아들들 비리를 비롯한 현 정권의 권력 부패다. 그러나 민주당 역시 그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대통령이 탈당했으니 당은 권력비리와 관계없지 않느냐는 논리는 한마디로 우스운 얘기다. 국민이 보는 민주당은 여전히 현 정권과 동일체다. 더구나 언제는 권력비리를 감싸는 데 급급하다가 이제는 남남이라고 해봐야 미운 털만 박힐 뿐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심은 그런 민주당에 철저히 등을 돌렸다.

노 후보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것은 지방선거 참패의 여파인가, 아니면 그의 인기 급락(急落)이 지방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인가. 딱 잘라 어느 쪽이 먼저라고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둘이 맞물렸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히딩크 어록´ 살펴보면▼

그 원인 중 하나로 ‘말의 불안정성’을 생각해보자. 노 후보는 구어체(口語體)와 그것이 활자화됐을 때의 차이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한 듯하다. 이를테면 대중연설에서 “남북대화만 성공하면 나머지는 깽판쳐도 좋다”고 했을 때 대중은 그것을 재미있어 하고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깽판’이 활자화되면 느낌이 달라진다. 반어법(反語法)의 화술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눈살부터 찌푸리게 마련이다. 말한 이의 품격이 너무 낮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런 저급한 발언이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에게서 나왔다면 고개를 젓기 십상이다.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정치 언어도 역겹지만 지나치게 튀는 말의 가벼움으로는 통합의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다. 노 후보는 이제 그 점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노무현 프로그램’에 1순위로 올려야 할 항목이다. 한국축구의 ‘8강 신화’를 이뤄낸 거스 히딩크 감독의 어록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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