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움베르토 에코의 '바우돌리노'

  • 입력 2002년 5월 3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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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돌리노/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424쪽 9500원 열린책들

움베르토 에코의 네 번째 소설 ‘바우돌리노’는 12세기 이탈리아 농부의 아들이자 독일황제 프리드리히의 양아들인 바우돌리노가 펼치는 모험담과 그가 주변사람에게 전하는 또 다른 모험들이 섞인 장편소설이다.

희대의 거짓말쟁이 바우돌리노의 이야기가 펼치는 독특한 세계 속에서는 역사와 허구,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무수하게 중첩되는 거짓말들의 베일 아래에서 한 가닥 진리의 빛이 스며 나온다.

성 바우돌리노는 에코의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의 자그마한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운 전설적인 인물이자 수호성인이다. 그의 모험이 전개되는 12세기 후반의 유럽은 역사와 전설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고, 그것은 십자군 원정의 열기 속에 더욱 극적인 형태로 고조되었다. 한낱 시골뜨기 소년이던 바우돌리노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빨간 수염’ 프리드리히 1세의 양자가 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갖가지 모험을 겪는다. 소설은 그의 경험담을 비잔틴의 역사가 니케타스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배경인 프리드리히의 이탈리아 공격, 십자군 원정,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등은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바우돌리노의 회상 속에서 현실과 환상이 뒤엉키고, 때로는 허구가 사실을 압도하기도 한다. 가령 요한 사제의 왕국을 찾아가는 여행은 중세의 동물 우화집에 나옴직한 환상의 세계를 재현한다. 이런 면에서 ‘바우돌리노’는 역사 소설, 피카레스크 소설, 환상 소설, 동화와 민담의 기법들이 함께 뒤섞인 혼성 모방 작품이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이 에코의 소설은 기호학 이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소 그는 기호학이 이론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을 소설에서 다룬다고 주장했고, 이것은 ‘기호학의 소설화’로 구체화되었다. 특히 그는 일반 기호학 이론의 방법론적 가설로서 ‘거짓말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기호란 본질적으로 거짓말을 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 또는 소설이 언어 기호를 통해 재현될 수밖에 없다면, 거기에는 언제나 거짓말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진실이 거짓말에 의해 왜곡될 수 있듯이, 거짓말을 통해 진리가 드러날 수도 있다. 이러한 기호의 양면성은 ‘바우돌리노’의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들에서 예시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거짓말은 중세 유럽의 한 단면, 그 진정한 모습을 색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데 기여한다. 그것은 허구의 ‘가능 세계들’을 통해 현실 세계를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방식이다. 시인의 임무는 바로 ‘멋진 거짓말들을 꾸며내는 데 ’ 있으며, ‘다른 세계들을 상상’함으로써 ‘결국은 이 세계까지 바꾸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에코 자신의 말에 의하면 ‘바우돌리노’는 대중적이다. 이전의 세 소설이 독자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교양과 지식을 요구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중세 유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요구하고, 여러 가지 은유와 암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만큼 여기에서는 서로 다른 의미의 그물들을 엮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초 70세 생일을 맞이한 에코는 이 소설을 출판하기 몇 달 전에 태어난 손자 에마누엘레에게 이 소설을 선물하였다. 사랑스러운 손자가 거짓말 이야기들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언젠가 바우돌리노보다 더 대단한 거짓말쟁이 이야기꾼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는데, 혹시 에코 자신이 그런 인물이 아닐까?김 운 찬 대구 가톨릭대학교 이태리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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