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논설위원칼럼]성경륭/대선주자 반성문 먼저 써라

  • 입력 2002년 1월 24일 18시 11분


새해가 시작되기 무섭게 정국이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다. 전당대회 시기를 놓고 갈등을 빚던 민주당의 제 정파들이 4월 20일 전당대회 개최와 국민경선제 도입에 합의하면서부터 대선을 향한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상황이 급변하자 그간 대정부 투쟁에 치중해왔던 한나라당에서도 당내 민주화운동이 불 붙고 대선후보 경선을 위한 소수파의 도전이 강력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언론에서도 연일 대선 예비후보들에 대한 지지도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을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국민은 5년 전, 10년 전 큰 기대를 안고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했던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결국 부패와 무능으로 국민을 실망시켜왔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후배들이 다시 국민 앞에 나와 자신이 나라를 이끌 적임자라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라와 자신들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차기 대통령의 선출 과정을 외면할 수도 없다. 이것이 현재 우리 국민이 안고 있는 딜레마다.

▼부패책임 외면 제자랑만▼

최근 신문과 방송에 등장하는 대선 예비후보들의 언행을 보면 과연 이들이 국민의 아픔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국민 앞에 나설 때 이들은 그동안 발생한 각종 부패사건과 정책실패에 대해 정치권을 대신하여 무릎 꿇고 사과부터 하는 것이 옳다. 이로 인해 민주국가의 체통이 망가지고 주권자의 자존심에 말할 수 없는 상처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목숨을 바쳐 국민을 섬기겠다고 약속하는 대선 예비주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주자들은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한지, 다른 후보보다 내가 왜 경쟁력이 있는지를 주장하고 선전하는 데 더 몰두하고 있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정은 법관을 선발하는 사법시험도 아니며 가수를 뽑는 노래자랑도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국민적 축제와 선택의 과정이다. 따라서 자기자랑만 늘어놓아서는 결코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국민을 참으로 걱정시키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가 국내외적으로 위기와 불확실성이 농축된 ‘위험지대’를 지나가고 있으나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진단과 대책을 어느 후보에게서도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먼저 국제적 측면에서 보면 아프가니스탄 대 테러전 이후의 국제정세 변화, 미국의 패권강화와 주변국의 저항, 남북관계의 경색 등 탈냉전 이후 세계와 한반도의 정치 안보상황이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국경 없는 경제의 도래, 무한경쟁의 심화, 지식기반 경제의 등장 등 숨막히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국내적으로 볼 때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 지역주의와 집단이기주의의 분출로 큰 혼란을 겪어 왔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고용의 불안정과 불평등의 확대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는 불신과 대립의 만연으로 사회적 자본의 만성적 결여에 시달리고 있다. 그에 따라 신뢰와 협력과 같은 공공재를 제대로 산출하지 못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에 장애가 되는 비생산적 제도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면 민주주의의 생산성을 제고하고 경제사회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하면서 국제 정치 경제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공동 번영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원론적 담론 타령 이제 그만▼

우리는 대선 예비주자들로부터 이런 문제에 대한 그들의 고민과 처방을 듣고 싶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끝없는 자기자랑과 원론적 담론만 듣고 있으니 기분이 영 말이 아니다. 이래 가지고는 국민을 안심시킬 수 없다. 외환금융위기와 같은 외우와 의약분쟁과 같은 내환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리더십이란 불확실성과 위험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로 국민을 이끌고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선지자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미래의 위험을 잘못 판단하면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성자(聖者)적 경건함도 가져야 한다. 대통령 선출이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비주자들이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이 같은 덕목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륭 한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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