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석학에게 듣는다]美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

  • 입력 2002년 1월 2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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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까지는 물질의 최소 단위를 알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지배해 왔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부분의 단순한 합으로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생겨났다. ‘베이징의 한 나비의 날갯짓이 허리케인을 불게 할 수 있다’는 이른바 ‘나비효과’를 비롯해 카오스 이론 등 복잡계 과학이 일반에게 알려진 것. 복잡계 과학은 21세기의 주류학문인 생명공학, 나노과학 등의 이론적 토대가 됐고 나아가 경제학, 주식시장, 날씨 등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린스턴대학의 필립 W 앤더슨 명예교수는 이런 시각에 큰 영향을 준 학자. 그는 전공인 물리학에 머물지 않고 군축, 환경 문제 등 사회 전 분야에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서울대 오세정(吳世正·물리학) 교수가 그를 만났다.

▽오세정 서울대교수〓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눈부시게 빨라지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일찍이 ‘많은 것은 다르다(More is different)’라는 글을 통해 환원주의(還元主義·reductionism·생명현상을 물리, 화학적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봄) 과학을 경계하고 복잡성의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최근 물리학과 화학, 생명과학의 발전은 그 방향을 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21세기 과학의 발전은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측하십니까.

▽필립 W 앤더슨 프린스턴대 명예교수〓21세기에도 천체물리학으로부터 생명과학까지 복잡성 연구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최근까지 생물학의 유전자 지도 연구는 개별 유전자의 구조를 밝히는 게 주요 목적이었지만, 과도기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앞으로는 점점 유전자들의 기능과 그 상호작용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21세기 과학의 또 다른 특징은 여러 분야의 학문이 통합되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컨대 뇌의 작동 원리를 생물학적으로 연구하는 생리학과 인간의 심리상태를 사회과학적 으로 이해하려는 심리학은 점점 통합돼 나갈 것입니다.

▽오 교수〓미국은 최근 지구온난화에 대비한 국제협약인 ‘교토(京都)의정서’를 과학적 근거가 약하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비준하지 않았는데, 일부 과학자들이 논리를 뒷받침했습니다. 이런 경우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닐까요.

▼과학자의 책임 갈수록 커져▼

▽앤더슨 명예교수〓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늘고 지구의 온도도 높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상황이 악화될 위험이 높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만일 기차가 다른 기차와 정면 충돌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충돌 전에 멈출 수 있을지 따지기보다는 먼저 뛰어내리는 게 현명한 방안이 아니겠습니까. 일부 과학자가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면, 책임 있는 과학자들이 나서 일반 대중이나 정치권을 상대로 설득해야 합니다.

▽오 교수〓과학적 연구결과가 사회에 미치는 큰 영향 때문에 자연과학자의 연구에 사회적으로 제한을 가하려는 추세가 요즘 강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복제실험 등 생명공학 연구에는 종교계를 비롯한 사회 각 층에서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자폭탄은 말할 것도 없고 원자력 발전에 대하여도 반감이 있어 연구가 위축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앤더슨 명예교수〓사실 과학적 연구의 사회적 영향력은 이제 너무 커져 과거처럼 모든 것을 과학자 사회에 맡겨달라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미 대학연구를 지원하는 미국 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도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있거나 경제적 이익이 눈에 보이는 연구에 좀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결정이 과학 발전이나 사회의 필요에 맞는 방향으로 내려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입니다.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화석연료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위협을 과소평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원자력발전소는 효율성과 안전성 면에서 훨씬 좋게 설계를 바꿀 수 있고, 또 바꿔야 합니다.

▽오 교수〓과학자 집단은 지금까지 그런 대로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지식체계를 만들어 사회에 기여해 왔다고 믿는데, 과거처럼 그냥 맡겨두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앤더슨 명예교수〓과학자들이 과거 믿을 만한 지식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정직하거나 선량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과학자 사회가 자유롭게 상호비판하는 등 건강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과학자들은 옳은 이론을 발표해도 명성을 얻지만, 남의 이론이 틀렸다고 증명해도 유명해집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의 일을 면밀히 검토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자유롭게 비판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이런 구조가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오 교수〓20세기는 물리과학(physi-cal science)이 주도했다면, 21세기는 생명과학(life science)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물리과학이 군사목적으로 많이 이용된 역기능이 있었다면, 생명과학은 상업성에 너무 물들어 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앤더슨 명예교수〓과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을 만들어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세계 역사에서 전쟁의 참혹성을 본다면 제1차 세계대전이 훨씬 더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화약이 발명되기 전 창과 도끼로 싸우던 로마시대의 전쟁이 현대전보다 덜 잔인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이 전쟁을 더 잔인하게 만든 것은 아닐 겁니다. 물론 생화학전은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되므로 경계해야 되겠지만요. 생명과학이 상업성에 물든 것은 특허 정책의 잘못이 한 원인이 됐다고 봅니다. 특히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신약허가 과정이 너무 길고 돈이 많이 들어 현실적으로 돈 많은 회사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 교수〓최근 미국의 미사일방어(MD)구축계획에 대한 국제사회의 논란이 뜨겁습니다. 기술적으로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는지, 또한 이 문제에 대한 과학자들의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앤더슨 명예교수〓닉슨 대통령 때부터 MD에 관심을 가졌지만 직접적인 국방연구는 피해왔기 때문에 사실 관련 전문가는 아닙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의 토론을 보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현재의 기술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기술적 문제를 떠나서라도 MD체제를 추진하는 논리에는 근본적인 허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MD체제로 막을 수 없는 위협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미사일이나 크루즈 미사일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테러나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위험에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러기에 만일 MD체제가 제대로 작동한다해도, 프랑스의 마지노선처럼 단지 심리적으로 안전감을 느낀다뿐이지 실제 국방에는 큰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둘째는 어느 나라의 무기도 없는 중립지대인 우주 공간에 무기를 넣는 첫 번째 선례를 만드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만일 미국이 우주에 무기를 넣기 시작하면 다른 나라들도 뒤따라 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 머리 위로 무기들이 날아다니는 위험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오 교수〓물리학 등 기초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사회나 국가가 기초과학의 연구에 투자할 이유나 필요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앤더슨 명예교수〓먼저 기초과학은 그 나라의 과학 교육에 필수적입니다. 기술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현 시대에는 초중고교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기초과학 교육이 중요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기초과학분야에서 교육을 받고도 전혀 다른 분야, 예컨대 미국 월가의 주식시장 등에서 우수한 실적을 올리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기초과학자는 기술의 발전 추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있던 벨 연구소를 보더라도 기초과학 연구에서 파생되는 상품의 부가가치가 워낙 높기 때문에 그 추세를 파악하는 사람들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국가나 사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 교수〓교수님께서는 최근 미국에서 과학 연구 분야에 종사하려는 우수한 인재들의 수가 점점 줄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한 원인 분석과 대책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면….

▼돈 지상주의… 기초과학 외면▼

▽앤더슨 명예교수〓한국이나 일본의 사정을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미국의 황금지상주의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미국에서는 모든 가치의 기준이 돈으로 획일화돼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는 매력이 없는 편이지요. 한국에서 여성 과학자의 수가 적다면 여성을 위한 채용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같은 것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다만 쿼터를 정하는 것보다는 출산 시기를 피해 대학교수로 임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등 운영의 묘를 살리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

▽오 교수〓초중등 과학교육에서도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나노기술, 환경기술, 생명과학, 정보기술 등이 국가의 경쟁력이 되는 지식기반 사회에서 매우 우려되는 일인데 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까요.

▽앤더슨 명예교수〓정말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간단한 해답은 없는 것 같고, 다만 교사들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려면 역시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하는 교사의 봉급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 교수〓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가 간의 기술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이에 따라 빈국과 부국 간 생활수준 격차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세계화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보십니까.

▽앤더슨 명예교수〓필연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도의 경우는 최근 소프트웨어 산업의 발전으로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결국 좋은 교육제도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세계화 시대에도 개발도상국의 발전과 국제적 경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프리카나 이슬람권의 많은 국가들은 아직도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여러 가지 사회적 정치적 원인 때문에 가까운 시일 안에 그 질곡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별로 안 보인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필립 앤더슨 누구인가

1923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난 필립 W 앤더슨은 77년 ‘자기적 성질과 비결정 물질의 물성에 관한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고체 물리학계의 대부. 49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벨 전화 연구소에 들어가 연구에 전념했다.

그가 72년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많은 것은 다르다(more is different)’라는 짤막한 글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근본물질과 힘을 연구하는 소립자물리학이 통일이론을 완성하면 자연과학의 모든 부분을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

75년부터 프린스턴대 물리학 교수를 맡은 그는 84년에는 머리 겔만(69년 노벨물리학상), 케네스 애로(72년 노벨경제학상)와 같은 석학들과 함께 자유롭고 학제적(學際的)인 연구를 위해 샌타페이 연구소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군축문제 환경문제 등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도 여러 편 발표했고, 저서로는 ‘고체의 개념’ 등이 있다. 공인 바둑 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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