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가바시마 이쿠오/패자부활 시스템 만들자

  • 입력 2001년 11월 28일 18시 21분


금년이야말로 ‘있소’ 하며 12월을 보내자.

매년 12월이 되면 구마모토(熊本)지방에서 만들어진 작자 미상의 이 센류(川柳·일본 정형시의 일종)가 떠오른다.

▼입시실패가 인생실패 돼서야▼

우리 가족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입은 옷 그대로 만주에서 철수했다. 아버지는 5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생활은 너무나 가난했다. 12월이 되면 여기저기서 빚쟁이가 몰려온다. 12월이 됐다고 해서 돈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기간 중 행방불명이 된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신문에서 찾아내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 바로 이 센류다. 올 12월 정도는 빚쟁이가 “계십니까” 하고 오더라도 “있소”라며 큰 소리로 대답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심정이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도 “있소”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내가 고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이런 가정 환경 때문에 나는 학생시절 공부를 잘 못하는 ‘낙제생’이었다. 다만 책은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고 위고와 같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역시 초등학교 때 읽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감명을 받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정치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또 아소(阿蘇)산 자락에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소의 대평원에 목장을 열어 말을 달리며 소를 쫓는 카우보이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적도 있다. 결국 고교를 졸업하고 마을 농협에 취직해서 쌀수매와 비료, 프로판가스 등을 배달하면서 소년시대의 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지만 꿈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21세 때 목장을 열겠다는 꿈을 안고 농업연수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육우농가에서 2년간 실습했다. 그 후 또래들보다 6년 늦게 미국 네브래스카대 농학부에 입학했다. 학부에서는 축산학을 전공했지만 정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해 정치학을 공부했다. 한번도 정치학 코스를 이수한 적이 없는 외국인 학생을 장학금까지 주어가며 입학시켜준 하버드대의 대담함에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1997년 쓰쿠바(筑波)대에서 도쿄(東京)대에 초빙됐을 때 ‘농협직원에서 도쿄대 법학부 교수로’라고 매스컴에서 화제가 됐지만 실제로 농협에 근무한 것은 2년 조금 안 된다.

내가 미국에서 자력으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개방적이고 탄력성 풍부한 미국 교육제도의 덕분이다. 국적 연령 경력을 묻지 않고,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미국인의 신조는 교육제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자유주의 진영의 맹주로서 서방 여러 나라의 경제발전이나 안전보장을 도와줬지만 미국의 가장 큰 공헌은 아메리카대륙이 발견된 이래 세계의 아웃사이더들에게 꿈을 줘 왔다는 것이다.

그와 비교하면 일본에서는 (아마도 한국에서도) 대학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가가 중요하다. 수험전쟁 때문에 학원이 번창하고 어느 대학에 진학하느냐는 부모가 어느 정도 자녀에게 투자했느냐에 좌우된다. 지금은 도쿄대 등 유명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생은 사회적으로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의 자녀가 거의 대부분이다. 어린이들은 경쟁과정에서 자유롭게 노는 일과 독서를 희생하고, 경쟁에서 뒤진 어린이들은 삶의 보람을 잃어버리면서 학급 붕괴가 일어난다. 사회에 패자부활의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한번 뒤지면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

대학 입시철이 되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거나 시험에 실패한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장래 이들이 나이에 관계없이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할 수 있도록 대학의 문호를 넓게 열고, 사회도 취직이나 승진 등의 면에서 호의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패자부활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낙제생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내가 농업연수생으로서 미국에 가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소의 대평원에 목장을 갖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버드대에 진학한 것은 정치학을 배우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에 실패해도 꿈을 잃지 않고 노력했으면 한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므로.

가바시마 이쿠오(蒲島郁夫·도쿄대 법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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