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익명의 인터넷 고수 알고보니 프로

  • 입력 2001년 11월 18일 18시 39분


▼조훈현 9단 "머리 식힐 겸" 윤기현 정동식 김기헌 단골

최근 인터넷 바둑사이트 ‘타이젬’의 한 대국실에서 있었던 일. 바둑을 두던 두 대국자가 모두 나갔지만 수십명의 관전객들이 그대로 남아 채팅을 하고 있었다.

“야, 그렇게 잘 두는 사람이 있다니. 혹시 프로기사들 아냐.”

“진 쪽이 한국기원 연구생 최상급인 1조에 속해 있다고 하던데.”

“연구생 1조를 선으로 가볍게 이길 정도면 프로기사 중에서도 최정상급인데 과연 누굴까.”

이들의 대화는 결론없이 끝났지만 이 바둑을 둔 정상급 기사는 바로 조훈현 9단이었다.

타이젬 관계자에 따르면 조 9단이 가끔 머리를 식힐 겸 익명으로 인터넷 바둑을 둔다는 것.

네오스톤 넷바둑 오로 사이버기원 등 주요 바둑 사이트에 프로기사들이 익명으로 들어와 바둑을 두는 사례가 적지 않다. 프로기사가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한국기원이 운영하는 사이버기원. 사이버기원 관계자는 “랭킹 50위까지는 대부분 프로기사고 프로기사 ID는 중복 ID를 포함해 약 200개 정도 된다”고 말했다.

나종훈 4단, 윤기현 9단, 정동식 5단, 조대현 9단, 김기헌 4단 등이 단골멤버.

넷바둑에는 은퇴한 김희중 9단을 비롯해 전영선 강만우 8단, 김원 6단 등이, 오로에는 정대상 8단, 김성래 2단, 천풍조 김동엽 7단 등이 짬짬이 바둑을 즐기고 타이젬에서는 서능욱 9단, 김성룡 7단 등이 자주 바둑을 둔다.

인터넷 바둑이 처음 생길 무렵에는 젊은 층들이 많았지만 최근엔 장년층 기사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 윤기현 9단은 “젊은 기사들과는 달리 평소 마땅히 바둑 둘 상대가 없는데 인터넷 바둑에선 선, 두점으로 바둑을 둘 수 있어 감각을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며 “요즘 장년층이 성적을 내면 ‘인터넷 바둑을 열심히 두나보지’라는 말을 농담처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한 장년층들은 시간패를 당하거나 잘못 착점하는 경우가 10판에 1,2판은 꼭 나온다고.

프로기사들은 익명으로 바둑을 두기 위해 2,3개의 ID를 갖는 게 기본. 김 7단이나 양건 6단은 수시로 ID를 바꾸기도 한다.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알려진다 해도 다른 하나는 철저히 비밀로 한다.

프로기사들이 많다보니 서로 프로인줄 모른 채 바둑을 두는 경우도 심심찮다. 정동식 5단의 후일담. 사이버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정 5단은 상대방이 계속 대국실을 들락날락하자 화가 난 나머지 관계자를 불러 누구인지 당장 알아보라고 시켰다. 관계자가 확인해 보니 그 사람은 프로기사였다는 것. 그 기사는 컴퓨터 이상으로 들락날락했음이 밝혀졌다.

한 프로기사가 말하는 인터넷 상에서 프로기사 감별법.

“바둑은 엄청 센데 채팅을 하면 절대 응답없이 바둑만 묵묵히 두고 바둑이 끝나면 황급히 사라진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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