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수지의 사랑은 몇 달이 가지 못했다. 수지는 이듬해, 그러니까 옥분이로 고향을 떠난 지 14년이 지난 87년 1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목 졸려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 해 1월 3일, 헤어지자는 말에 격분해 수지를 살해한(검찰 공소장 내용) 윤씨는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월북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대사관측이 거절하자 거꾸로 ‘북한공작원이었던 수지 김과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의 공작으로 북으로 납치될 뻔했다가 탈출했다’는 자작극을 연출했다. 수지 김은 졸지에 간첩이란 누명까지 뒤집어썼지만 ‘수지의 진실’을 밝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14년이 지나서야 ‘수지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당시 안기부가 윤씨의 범행인 줄을 모두 알았으면서도 ‘시대 상황과 국내외 사정’을 고려해 모른 척 했다는 것, 그 덕에 범인 윤씨는 지금껏 ‘성공한 벤처인’으로 행세해 왔다는 것까지 모두 밝혀졌다. 홍콩의 한 공원묘지에 묻혀 있는 수지 김이 이 기막힌 사실을 안다면 한줌의 재로 변한 육신일망정 치를 떨며 통곡할 일이다.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수지 김 가족의 지난 14년 세월은 ‘악몽’이었다. 수지의 언니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변사체로 발견됐고 오빠는 술에 절어 살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역시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돌아갔다. 올케의 아들은 ‘빨갱이 집안’이라는 손가락질에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고 한다. 이제 누가 있어 이들의 맺힌 한(恨)을 풀어줄 수 있단 말인가.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