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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29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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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앤지(G&G) 회장 이용호(李容湖)씨 비리 비호의혹사건과 제주경찰청 정보보고서 유출 사건 등의 파장으로 경찰과 검찰은 물론이고 공직사회 전반에 걸쳐 ‘몸 사리기’가 극심하다. 이런 현상은 연말 인사를 앞두고 오해를 살 소지를 없애고 정권 말기를 맞아 ‘줄대기를 한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대부분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화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입 조심에도 매우 신경 쓰고 있다.
경찰의 경우 두 사건으로 연이어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인지 특히 그 정도가 심한 편.
서울경찰청에서 마당발로 소문난 A총경은 이달부터 아예 외부인과의 접촉을 끊고 지낸다. 예전에는 점심때마다 고향 친구나 선후배 등 ‘손님’을 맞기에 바빴지만 요즘에는 부하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A총경은 “‘요즘엔 차라리 도시락을 싸 갖고 다니는 게 낫겠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의 일선 경찰서장인 B총경은 최근 향우회와 동호회 등 각종 외부 모임에 일절 참석하지 않고 있다. 두 사건 이후 경찰 서장 등 주요 간부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요 감찰 대상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기 때문.
그는 “가까운 친구와 만날 때도 반드시 다른 사람의 동행 여부를 확인한다”며 “괜히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정치인 등 관내 주요 인사들과의 만남도 피한다”고 말했다.
일선 실무자들의 ‘조심’은 더욱 심하다. 최근 서울경찰청은 산하 각 경찰서의 정보 및 보안과 직원 전원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보안교육을 실시했다. ‘어떤 경우에도 민감한 정치 문제나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 주 내용.
일선 경찰서 정보과장 C씨는 “공교롭게도 두 사건 모두 정보과 간부와 직원이 연루돼 부서 전체가 눈총을 받고 있다”며 “일선 부하들에게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입에 자물통을 채우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검찰도 사정은 마찬가지.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고위 간부 3명이 옷을 벗은 데 이어 녹취록 파문으로 일선 부장검사까지 사임하는 등 ‘내환(內患)’이 겹치자 말과 행동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일선 검사들은 평소 알고 지내는 변호사는 물론 외부인과의 접촉도 꺼리는 상황. 서울지검의 한 평검사는 “동료 검사들 사이에서 내부 모임에 외부인의 참석을 금지하고 외부인과 함께하는 모든 식사나 술자리에서 더치 페이(각자 요금을 지불하는 방식) 규정을 만들자는 얘기가 오갈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지검 간부급 검사는 “가까운 동창들을 제외하고는 전화가 와도 거의 만나지 않는다”며 “특히 녹취록 파문 이후 누구를 만나도 사건과 관련된 민원이나 정치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말했다.
각 지방자치단체도 내년 단체장 선거 등을 앞두고 대대적인 감찰이 실시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잔뜩 움츠러든 상태.
서울 J구청의 관계자는 “벌써부터 정치권 등에서 ‘한번 만나자’는 제의가 잇따르고 있지만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고위 간부는 “최근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주말에 골프는 물론 외부 모임에 일절 나가지 않고 있다”며 “전화로 민감한 사안을 얘기할 때는 도청을 우려해 반드시 휴대전화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이 같은 현상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 물 밑에서는 은밀히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줄서기와 줄대기가 한창인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부처가 정책 결정을 제때 하지 않고 정치권에만 떠넘기는 것도 몸 사리기현상의하나라는지적이다.
중앙 부처의 한 국장은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개정하려는 시도가 몇개월째 표류하는 것은 집권 말기의 대표적인 권력 누수 현상”이라며 “부총리가 힘있게 추진할 수 있는 사안도 소모적인 회의만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부처의 한 간부는 “내년에 선거 정국이 되면 어떤 정책이든 정치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며 “요즘 ‘새 일은 벌이지 않고 조용히 지내겠다’는 간부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간부는 “요즘은 출신 지역이 다른 직원들끼리 만날 때는 입 조심을 하게 된다”면서 “정치 사건에 휘말리면 누군들 배겨낼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윤상호·이명건기자>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