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이래서 명작] 스탕달 '파르므의 승원'

  • 입력 2001년 9월 25일 11시 13분


◇ 스탕달과 연인들

스탕달은 늘 외모에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여인들과의 무성한 연애담을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기질은 바로 외삼촌인 로맹 가뇽의 영향인 듯싶다.

스탕달의 첫사랑은 배우였던 퀴블리 양이었다. 여리고 소심한 성격의 스탕달이었지만 그는 용기를 내 퀴블리 양의 거처를 알아냈다. 그후, 먼발치에서나마 그녀를 바라보려고 그는 집 주변을 맴돌곤 했다. 그러나 막상 퀴블리 양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자 당황해하며 도망치고 말았다. 그의 첫사랑은 이렇게 싱겁게 끝나고 만다. 하지만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상대는 여배우인 멜라니 길베르였다. 멜라니가 공연 때문에 마르세유로 내려가자, 스탕달은 과감히 따라 내려가 식료품점에서 근무하면서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 노력한다. 1800년 이태리에 체류했을 당시 스탕달은 안젤라 피에트라 그류아를 처음 보게 되는데, 그녀에 대한 스탕달의 열정은 무려 11년 동안 지속되다가, 마침내 1811년이 되어서야 그녀를 정부로 삼는데 성공했다.

이 무수한 여인들 중에서 스탕달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있었다면, 바로 마틸드 비스콘티니였다. 마틸드는 20세 연상인 남편과 별거중이던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자유주의 사상을 지닌 성숙한 여인이었다. 스탕달은 마틸드야말로 자신이 늘 꿈꿔오던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여겨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스탕달의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마틸드는 냉담한 반응만 보인다. 결국 스탕달의 사랑은 마틸드의 죽음으로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만 남긴 채 끝난다.

그런가 하면 스탕달을 열렬히 사랑한 여인도 있었다. 망티 장군의 부인은 부모와 친교가 있었던 탓에 일찍부터 알고 지내던 여인이었다. 1824년 스탕달이 용기를 내어 사랑을 고백한 후, 스탕달과 망티 부인은 정열적인 사랑에 빠진다. 유부녀와의 사랑이었던지라 위험이 뒤따랐던 만큼, 그 둘은 비밀리에 만나야 했다. 한번은 스탕달이 지하실에 숨어서 사흘 동안이나 견디며 망티 부인이 가져다주는 음식만 먹고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와의 밀회는 성격 차이 때문에 끝나버린다. 이들 외에도 스탕달과 스치듯 사랑을 나눈 여인들로는 알베르트 뤼방프레, 알렉상드린 프티와 이탈리아 처녀 지율리아 리니에리 등이 있었다. 이들과의 사랑은 한낮 일시적인 불꽃장난 같은 사랑이었지만. 스탕달의 정열을 끊임없이 불사르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여인들과의 사랑은 바로 스탕달을 작가로 이르게 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은 곧 작품 속에 그려진 주인공들의 사랑이 되었다.

◇ 작가로서의 생애

스탕달은 당시 부유한 변호사였던 셰뤼벵 벨과 앙리에트 가뇽 사이에서 태어났다. 앙리에트는 스탕달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죽었는데, 이 사건은 스탕달의 일생에 가장 큰 충격이었다. 유년기 시절의 어머니의 부재란 바로 어린 스탕달의 성격형성과도 연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사랑이라는 이미지로 그에게 자리했던 반면, 아버지는 어린 스탕달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위선적이었을 뿐 아니라,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만 몰두하는 구두쇠 같았다. 스탕달은 이러한 아버지에게 반항심만 품는다.

스탕달을 작가의 길로 이르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외할아버지인 가뇽이었다. 그르노블의 덕망있는 의사였던 그는 일찍이 18세기 계몽사상과 합리주의에 눈을 뜬 지식인이었다. 평소 문학에 조예가 깊던 그는 스탕달을 사랑으로 감싸주었다. 스탕달은 그를 통해 예술과 문학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18세기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실제로 스탕달은 수학에 뛰어난 소질을 지니고 있어서 파리의 이공계 전문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 기회도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몰리에르 같은 극작가가 되고 싶어 이를 포기했다.

한편, 스탕달에게는 외촌인 로맹 가뇽과 할아버지의 누님인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로맹 가뇽은 준수한 외모에 호탕한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뭇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어린 스탕달은 그를 옆에서 지켜보며 열정과 연애에 대한 의식을 서서히 깨우친다. 그런가 하면 노처녀 엘리자베스는 스탕달에게 귀족적인 우아함과 명예를 자각하게 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스탕달이 태어난 시대는 나폴레옹이 개혁을 단행했던 혼돈과 격동의 시대였다.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는 나폴레옹의 깃발아래, 수많은 군중들이 구체제 정복에 가담했다. 평소 아버지에게 반항심이 깊었던 스탕달로서는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매혹적이었다.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스탕달은 실제로 친척 피에르 다뤼의 주선으로 나폴레옹 이태리 원정에 종군, 곧 소위에 임관하기까지 한다. 바로 이때 밀라노에서의 체류는 스탕달에게 이태리인들의 기질인 자유와 쾌락, 정열을 깨닫게 해주었다. 스탕달에 있어 이태리는 곧 정신적인 고향 그 자체였다.

1802년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몰리에르 같은 극작가가 되겠다는 각오아래 문학수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1806년부터 제정 붕괴시기인 1814년까지 나폴레옹 정부에서 관리로 지낸다. 그후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실직하게 된 스탕달은 본격적인 문필 활동에 들어간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전제 군주제하의 이태리는 나폴레옹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사상이 전파되고 있었다. 밀라노에 살던 델 동고 후작은 전제군주 옹호자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입성소식을 듣고는 부인과 여동생 지나를 남겨둔 채, 그리안타에 있는 별장으로 피신한다.

세월이 흐른 후, 지나는 혁신주의자인 피에트라네라 백작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곧 오빠의 반대에 부딪쳐 심한 갈등을 겪는다. 결국 그 두 연인은 밀라노에 와서 결혼한다. 한편 후작 부인은 프랑스 군대가 물러가고 난 얼마 후에 곧 둘째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 파브리스는 총명했지만 후작의 무관심으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지냈다. 반면, 지나는 파브리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남달리 귀여워했다. 그녀는 후작의 허락 아래, 파브리스를 밀라노에 데려와 교육시킴으로써, 숨은 재능을 발휘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잠시, 곧 후작은 파브리스를 빼앗으러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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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최진휘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불어과를 졸업했다. 논문〈뒤라스의 '연인 L'Amant'에 나타난 동양의 이미지〉

<제공 : 북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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