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김미현씨,'권성우교수 비판문'에 반론 제기

  • 입력 2001년 7월 30일 18시 19분


김미현씨
<<문학평론가 김미현씨가 자신의 비평집 ‘판도라 상자 속의 문학’(민음사)에 대한 권성우 교수의 비판문(7월24일 A17면 보도)에 맞서 반론을 보내왔다.<편집자> >>

본인의 비평집 ‘판도라 상자 속의 문학’에 대한 권성우의 비판은 한 개인에 대한 논의를 넘어 비평의 본질로 확대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주요 논점이 되는 ‘읽히는 비평’의 의미와 의의를 재확인함으로써 그의 지적을 ‘가능한’ 비판이 아니라 ‘중요한’ 비판으로 삼고자 한다.

전성기와 수난기를 모두 겪은 90년대 비평은 두 번 실패했다. 기회를 위기로 만들었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비밀’ 중의 하나가 너무 난해해서 다른 비평가나 작가들조차 비평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폐증을 보이면서 ‘그들만의 리그’에 몰두한 비평에 대해 일반 독자들도 염증과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다.

‘읽히는 비평’은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한다. 독자와의 소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독자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평의 하방(下放) 현상”이 우려될 만큼 ‘책맹’들과 무조건 영합하자는 것이 아니다. 독자를 ‘글쓰지 않는 비평가’로 적극 흡수하자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깊이와 논리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읽히는 비평’은 자연스러운 깊이와 고도의 논리를 더욱더 요구한다. 어려운 것일수록 쉽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잘 읽히기 때문이다. 권성우가 말하는 비평의 본질이 어려운 것을 어렵게 말해 문학을 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제대로 된 난해한(?) 비평”이나 ‘매혹적인 비평’은 ‘읽히는 비평’과 같은 말이다.

당연히 ‘읽히는 비평’은 이론에 기대어 손쉽게 깊이와 논리를 확보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만약 비평이 소수자나 망명자의 장르라면 그 이유가 “이론의 전면적인 모험”을 시도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깊이와 논리는 지식이 아니라 통찰에서 온다.

그리고 비평가는 ‘혼자’ 보는 자가 아니다. 가장 ‘먼저’ 보고 맨 ‘끝’까지 보는 자이다. 그래서 불안하고 고독한 자이다. 그러니까 독자에게 ‘같이’ 보자고 청하는 자이다. 이때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문체가 중요해진다. 말장난이 아닌 말놀이나 분장술이 아닌 화장술은 논리나 분석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수사를 통해 논리는 강화되고, 명명을 통해 분석은 분명해진다. 잉여가 아닌 충족을 통해 설득에 복무하는 것이 수사나 명명이다. “비유 그 자체를 위한 비유”라는 추상적 평가나 “과잉 투자”라는 주관적 기준만으로 수사나 명명 자체를 폄하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읽히는 비평’이란 수준 낮은 비평이 아니라 쉽게 전달되는 비평이다. 때문에 지적 우월감에 빠진 현학적인 분석보다는 문학을 억압하지 않는 재미있는 분석이 중요하다. 물론 이런 비평은 비평의 ‘전부’가 아니라 ‘기본’이다.

현재의 비평이 당한 재난은 너무나 당연해서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평에게는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이다. 그러니 대처해야 한다.

김미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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