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윤석원/韓-칠레 자유무역 서둘다 망칠라

  • 입력 2001년 7월 18일 18시 36분


최근 정부는 뭔가 조급하고 쫓기는 듯하다. 국정 운영에 여유가 없어 보인다. 세상사가 그렇듯이 서두르다 보면 일을 그르치기 쉽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도 초조해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올해 들어 3월2일 막 5차 협상을 위해 떠나려던 협상단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 정부는 농업계 및 시민단체의 강한 반발을 무시하면서까지 무리한 양허안을 낸 데 비해 칠레측은 오히려 한국이 관심을 갖고 있는 가전제품과 자동차 등 공산품은 모두 뒤로 뺀 채 4차 협상 때보다도 후퇴한 공산품 양보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외 없는 관세 철폐’라는 원칙만 주장하면서 협정 추진 자체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칠레의 태도에 통상교섭본부는 당황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칠레측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실무교섭단을 급파해야 했다.

그런데 최근 통상교섭본부장이 남미 3국 순방길에 다시 칠레에 들렀고, 이에 몇몇 언론은 ‘협상 재개’라는 제목을 달았으니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정말 협상을 재개하러 갔다면 정식 협상단이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 현재 통상당국의 추진방식이다.

협상에서는 이쪽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줄 것과 받을 것을 냉정하게 저울질하는 것이 기본이다. 밀고 당기는 것이 협상이며 하다가 안되면 그 때 가서 포기할 수도 있다. 반드시 언제까지 타결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조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자간 협상도 아니고 양자간 협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칠레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농민 탓으로 돌리려는 이상한 논리를 유포하고 있다. 세계화 과정에서 고립되지 않으려면 칠레와의 협정을 빨리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농민이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협정이 체결될 경우 피해 당사자가 되는 농민이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적극 수립하면 되는 것인데 농민들의 반대 때문에 협상이 타결되지 않는다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사실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정부의 불필요한 저자세와 칠레측 사정 때문이었지 농민들의 반대 때문이 아니었다. 칠레는 12월 총선을 앞두고 내부적으로 제조업계간 의견 조정이 되지 않고 있다. 또 최근 유럽연합과 미국 등 거대 경제권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느라 한국과의 협상에는 크게 신경 쓸 여유가 없는 형편이다. 칠레의 속사정이 이러한데도 무엇 때문에 협상을 빨리 타결하려고 애걸복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실적에 급급하거나 체면을 내세워 협상을 서두르려고 저자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 협상이 타결되어도 양국에 별로 실익이 없음이 논증되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대응해야만 향후 칠레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FTA 협상도 원만하게 진행할 수 있다.

백년대계의 통상정책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좀더 멀리 내다보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 석 원(중앙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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