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일수/사후피임약 허용말라

  • 입력 2001년 7월 12일 18시 37분


최근 국내 한 의약품회사가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노레보정(레보노르게스트렐 0.75㎎) 수입허가를 신청했다. 식약청은 이에 대한 결정에 앞서 관련 사회 시민단체들에 의견을 부탁한 상태이다.

노레보정도 RU 486과 마찬가지로 먹는 사후피임약의 일종이다. ‘모닝 애프터 필(morning after pill)’로 더 널리 알려진 이들 사후피임약은 수정란의 자궁내막 착상을 방해하는 알약이다. 성교 후 정자와 난자의 수정 자체를 막는 이전의 피임약에 비하면 피임 효과의 범위를 훨씬 더 넓힌 개량된 피임약인 셈이다. 이들 알약은 수정란의 착상과 초기 배아의 발육생장을 돕는 여성호르몬 ‘프로게스테론’의 분비를 차단시켜 잉태를 막고 수정란을 고사시킬 수 있다.

약의 주성분에 약간의 첨가제를 곁들여 사후 피임 효과를 96%까지 끌어올린 이들 사후피임약이 시판된다면 사람들은 임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나아가 준비 없는, 또는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한 낙태의 부담을 사전에 줄일 수 있는 이점도 있다는 것이다. 임신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나 윤리적인 어려움에 홀로 내몰리게 될 여성들의 처지에서 보면 사후피임약이 일종의 심리적 정신적인 치료약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초기 배아의 고사제로 사용될 때는 적지 않은 윤리적 문제를 낳는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인간의 생명은 수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생겨난 수정란은 이미 정자 난자로부터 각각 23개씩, 46개의 인간염색체를 물려받은 유일한 존재이자 완성된 유전정보를 지닌 완전한 개체이다. 외부의 다른 방해가 없다면 이 생명체는 발육과 생장을 계속해 14일이 지나면 자궁내막에 착상되고 8주까지는 배아(embryo)로서의 지위를 얻는다. 8주가 지나면 태아(fetus)로서 생장을 계속해 10개월이 차면 세상으로 나온다.

수정 후 착상 이전까지 약 13일 동안에 이뤄지는 수정란의 체외배출이나 착상 방해행위도 초기 낙태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기는 하나 형법적 의미의 낙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형법의 생명보호는 착상 이후부터 진통 개시 직전까지를 낙태죄로, 진통 개시 이후부터는 살인죄 범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수정 이후 착상 전 단계의 초기 배아는 독일의 배아보호법 같은 특별법이 마련돼 있지 않은 우리의 법제도에서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후피임약의 복용으로 초기 배아를 살상한다 하더라도 형법적 불법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초기 배아에 대한 살육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윤리적으로 여전히 죄와 죄의식의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종교적 사회윤리적으로 낙태를 살인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하고 이를 폐사시키는 사후피임약은 치료약이 아니라 살상도구의 일종인 셈이다. 그것은 대자연의 대지에 돋아나는 식물을 고사시키는 제초제와도 같이 모성의 풍요로운 대지에 돋아나는 인간생명을 괴사시키는 화학무기라는 것이다. 결국 사후피임약의 시판 허용은 무분별한 제초제 살포처럼 모성의 자연이 품고 있는 풍요로운 모성적 생태계를 파괴할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사후피임약이 입고 있는 의약품이라는 너울은 실제 살상도구의 촉수를 위장하기 위한 지식의 간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같은 신중론은 낙태의 합법성 통로가 된 모자보건법의 실상에 비춰보면 비현실적인 사고로 비쳐질 수 있다. 모자보건법은 광범위한 낙태 허용사유를 열거하고 있고 그 시행령은 낙태 허용기간을 일률적으로 28주 이내로 규정한 때문이다. 하지만 임신 22주만 돼도 산모의 몸 밖에서 영아의 생존이 가능한 오늘의 의료기술 수준에 비춰 보면, 이 법률 자체가 철저히 비현실적이요 위헌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낙태금지가 여성에 대한 제도적 사회적 폭력이 아니라, 실제 모든 낙태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이 약이 시판되면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든 여성들은 파트너로부터 이 약의 복용을 강요받을 수 있고, 순수한 의미의 피임이 실패했을 때 그 후의 출산에 대한 비난을 여성 홀로 질 수 있다. 또한 자녀가 많은 가정에 대한 빗나간 사회적 비난도 더 높아질지 모른다. 사후피임약은 여성의 선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선택을 여지없이 강제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유념했으면 한다.

김일수(고려대 교수·법학, 본보 객원논설위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