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 책]김호기/'강화학 최후의 광경'

  • 입력 2001년 7월 6일 18시 48분


마음이 쓸쓸할 때면 가끔 찾아가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 아닌 섬 강화도다. 강화대교를 건너 전등사 옆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사기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평범한 이 바닷가 작은 마을이 바로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이 태어난 곳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건창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과 함께 구한말 한시 3대가이자 유명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강화학(江華學)이라 알려진 조선 후기 양명학자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우국충정에 분노해 자결했던 이시원(李是遠)이 다름 아닌 영재의 할아버지였으며, 영재는 이런 정신과 의리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내 전공은 아니나 커다란 감동을 받았던 책 가운데 하나가 조금은 이색적인 제목인 ‘강화학 최후의 광경’(우반, 1994년 출간)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뤄진 민영규 선생의 글 모음집 중 첫째 권으로, 강화학 관련 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양명학에 대해 아는 바 거의 없지만, 이 책 1부에서 다뤄지는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강화학자들의 삶은 흥미로우면서도 한없이 가슴이 아프다. 그 가운데 특히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단연 이 책의 백미(白眉)다. 강화, 개성, 구례, 서울, 그리고 만주와 블라디보스톡을 무대로 강화학자들이 기품 있게 견뎌왔던 삶은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이 땅의 지식인들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길이기도 했다.

민영규 선생에 따르면,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이 양명학의 가르침이라 한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바가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이 갈 길이라 한다. 매천이 남긴 절명시의 한 구절인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날을 생각하니 글하는 사람 갈 길 헤아리기 어려워라’도 이와 뜻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것은 지식인은 과연 자기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지식사회학적 질문이다. 굳이 푸코를 떠올리지 않아도 담론에 내재된 권력을 성찰해야 하는 것은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지식인의 당연한 의무이며, 그리고 이것이 강화학의 현재적 의미이기도 하다.

사기리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역시 바닷가 마을인 건평리가 나온다. 그곳에는 영재의 무덤이 있다.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서해의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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