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남찬순/마지막 상궁

  • 입력 2001년 5월 7일 18시 37분


조선왕조의 상궁은 제조상궁 부제조상궁 대령상궁 보모상궁 등으로 등급이 나누어져 있어 하는 일과 권한이 각각 달랐다.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 제조상궁은 정5품 벼슬로 왕을 가까이 모시는 까닭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같은 품계를 갖지 못한 궁녀는 보통 나인이나 애기나인이라고 불렸다. 나인이나 애기나인이 후에 왕의 은총을 받아 아기를 낳으면 후궁이 되기도 하고 상궁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궁녀는 대개 10년에 한번씩 선발하는 것이 관례였다. 궁녀의 선발조건도 상당히 까다로웠던 모양이다. 처녀여야 함은 물론이고 선조 중에 도적이나 역적이 없어야 했다. 그들은 관례식이라는 것을 통해 왕과 결혼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그 절차와 복장이 혼례식과 거의 같았다. 조선왕조 때는 궁녀가 보통 500∼6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궁녀들은 나이나 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본가로 돌아갔을 때도 결혼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상궁인 성옥염(成玉艶)씨가 4일 82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쳤다. 성씨가 궁궐에 처음 들어간 것은 1933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인 15세 때 우연히 창덕궁 침방 나인으로 발탁됐다고 한다. 갓 들어온 궁녀들은 의복을 담당하는 침방, 물과 청소를 담당하는 세수간, 수라와 간식을 담당하는 소주방 등 여러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다고 한다. 성씨는 순종황후 윤비(尹妃)의 의복담당으로 들어간 셈이다. 그로부터 윤비가 세상을 떠난 1966년까지 30여년간, 그는 한시도 윤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씨는 윤비가 세상을 떠나자 궁중법도대로 3년상을 치른 후에야 길게 틀어 올렸던 상궁의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결혼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친척이 있기는 하나 윤비만을 추모하며 홀로 여생을 보냈다. 1월 간병인에게 남긴 유언도 “저 세상에서 다시 윤비를 모실 수 있도록 그분의 위패가 있는 백운사에서 49재를 지내달라”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상궁으로, 쓰러진 왕가의 ‘전설’을 간직한 채 홀로 살아온 한 여인의 일생이 애절하다.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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